
'거미여인의 키스'의 아르헨티나 작가 마누엘 푸익은 다섯살 때부터 엄마 손에 이끌려 영화관을 출입했다. 한 잡지에 "나는 거의 매일 저녁 여섯시에 영화를 보러갔다"고 고백했다. 이 당시 어린 푸익은 30, 40년대 할리우드의 멜로드라마와 뮤지컬영화를 주로 보았는데, 이때의 기억이 그의 작품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그의 창작력과 기교가 정점에 달했던 1979년에 출간된 것이 '천사의 음부'다. 이 소설은 대중문화의 요소들이 가장 많이 침투된 작품이다. 특히 흥미로운 캐릭터가 '여주인'이다. 그녀는 무기상인 남편의 노예. 할리우드로 도망쳐 그곳에서 유명한 여배우가 되지만, 또다시 할리우드 제작자와의 계약조건에 의해 노예와 같은 삶을 살고, 결국 그녀를 시기하는 경쟁자에 의해 살해된다.
'여주인'은 푸익이 그토록 사랑했던 여배우 헤디 라마에게서 영감을 받은 캐릭터다. 갑부 무기상인 남편에 의해 수집돼 포로로 살던 그녀는 자기와 흡사한 하녀를 내세워 극적으로 파리를 탈출해 한때 할리우드에서 섹스심벌로 자리 잡은 비운의 여배우다.
푸익은 대중문화를 변형시켜 재생산과정을 통해 예술적으로 승화시킨 작가로 이름이 높다. '여주인'이 등장하는 부분은 30, 40년대 할리우드 B급 영화의 전형적인 문체가 사용된다.
멕시코의 한 병원. 아르헨티나에서 온 젊은 여성 아니타가 암치료를 받고 있다. 수술 뒤 호전되지 않는 그녀의 꿈속에 두명의 여인이 나타난다. '여주인'과 함께 또 하나의 여성인 'W218'이다. 그녀는 미래의 전체주의 사회에 살고 있으며, 정부의 지시에 따라 익명의 남자들과 성관계를 갖는 일을 하고 있다.
'여주인'에서 아니타, 그리고 'W218', 그 셋은 시공을 떠나 하나의 캐릭터, 바로 여성으로 귀결된다. 불행하고 배신당한 사랑, 그런 사랑을 위해 온몸을 바치는 여자들, 그리고 이런 주제에 맞물려 죽음, 모성애, 섹스 대상으로서의 여성, 그래도 집착하는 아름다움에 대한 집착 등 기본적인 여성의 정체성이 그 속에 녹아든다.
'여주인'과 'W218'은 여성으로서 기억과 경험을 공유하며, 아니타의 욕망과 무의식의 불안을 표현하는 대리물인 것이다. 그래서 이 소설은 남성작가가 쓴 라틴아메리카 최초의 페미니즘 소설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푸익의 다섯번째 소설인 '천사의 음부'는 아니타와 그녀의 페미니스트 친구인 베아트리스, 그리고 좌익 페론주의자인 포지가 등장해 성(性)뿐 아니라 페론 정권 아래의 아르헨티나 사회와 정치상황도 재구성한다. 대중문화와 페미니즘, 정신분석학에 정치적 코드까지 녹아든, 라틴아메리카 현대 소설의 매력을 한껏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이 책은 올해로 출간 50년을 맞은 을유세계문학전집 8권이다. 1959년부터 1975년까지 100권 완간된 기존 전집과 달리 완전히 새롭게 출발하는 것으로 을유문화사는 매월 2, 3권씩 올해 말까지 16권, 2020년까지 300권을 출간할 예정이다. 408쪽, 1만2천원.
김중기기자 filmtong@msnet.co.kr
댓글 많은 뉴스
최재해 감사원장 탄핵소추 전원일치 기각…즉시 업무 복귀
"TK신공항, 전북 전주에 밀렸다"…국토위 파행, 여야 대치에 '영호남' 소환
구미 '탄반 집회' 뜨거운 열기…전한길 "민주당, 삼족 멸할 범죄 저질러"
헌재, 감사원장·검사 탄핵 '전원일치' 기각…尹 사건 가늠자 될까
계명대에서도 울려펴진 '탄핵 반대' 목소리…"국가 존립 위기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