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마니아와 함께 떠나는 세계여행]지구의 끝을 찾아서-그리스 '메테오라'

'지구의 끝은 어디일까?'

엄마에게 혼나고 난 뒤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있던 어린 시절 나는 이런 생각에 골몰하곤 했다. 그럴 때마다 정신이 아득해지며 두통이 일었다. 그 생각에 빠지면 나는 늘 태양이 작열하는 사막을 걷고 있다. 주위엔 풀 한 포기도 없고 새 한 마리도 날지 않는다. 어딘가 지구의 끝이 있다면 그 곳에 숨어버릴 수 있을까. 아마 그 곳은 수천㎞의 높이로 깎아지른 낭떠러지의 벼랑이겠지. 생각할수록 무섭고 외로웠지만, 또 오직 나 혼자만 닿을 수 있기에 매력적이었다. 내일 새벽 당장 보따리를 싸서 떠나고 싶은 마음이 일면서 신이 났다. 나의 역마살의 시작은 아마 거기서부터였나 보다.

나이 들면서 지구는 생각보다 작고 둥글기 때문에 내일 새벽 출발해서(비행기를 타고) 한 바퀴를 돌면 다음날 저녁쯤엔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고야 만다는 '매우 실망스러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어디에도 혼자 숨어버릴 수 있는 비밀의 낭떠러지는 없었다. 그래서 '여행'이라는 것도 어린 시절 상상했던 것('신밧드의 대모험'이나 '80일간의 세계일주' 같은)보다 훨씬 시시한 것이 돼버렸다. 여행은 그저 가방을 싸서 인천공항 체크인 카운터에 줄을 서기만 하면 시작되는 거였다.

하지만 감격스럽게도, 나는 가끔 어른이 되어 떠난 '작고 둥근 지구에서의 시시한 여행'에서 어린 시절 꿈꾸었던 지구의 끝을 발견한다. 그리스 북부 산악지대의 '칼람바카'라고 하는 작은 마을이었다. 그 곳에 어린 시절 이불 속에서 상상했던 오직 지구의 끝에만 존재할 것 같은 낭떠러지들이 실제로 내 눈 앞에 펼쳐졌다. 비밀의 낭떠러지들의 이름은 '메테오라', 그리스어로 '공중에 떠 있다'는 뜻이다.

버스에서 내린 순간, 그 마을에는 무언가 신비한 기운이 번지고 있었다. 낮게 엎드려있는 지붕들 위로 고개가 꺾일 만큼 하늘로 치솟은 기묘한 바위기둥들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나를 굽어본다. 그 바위기둥들은 마치 하늘을 향한 재단 같았다. 천국행 비행장 같았다.

하늘로 열린 바위기둥 꼭대기를 향해 서서히 오르다보면 조금씩 지구의 신비로운 끝, 비밀의 낭떠러지가 드러난다. 그 괴상하고 뾰족한 바위기둥 꼭대기들은 놀랍게도 인간이 건설한 아름다운 집을 한 채씩 아찔할 만큼 아슬아슬하게 매달고 있다. 14세기의 수도원이었다. 인간의 힘으로 어떻게 저 꼭대기까지 올라갔을까. 맨주먹으로 어떻게 저 곳까지 돌과 흙과 나무를 날랐을까. 그 옛날 거대하고 막막하기만 했을 지구의 끝을 향해 묵묵히 행군한 순례자들의 행렬과, 어느 날 이 놀라운 지구의 끝을 발견했을 그들의 감격과, 하늘과 가장 가까운 곳에 가장 고결한 은둔처를 지어올린 그들의 너무나 인간적인 의지가 나를 감동시켰다. 그들은 지구의 끝을 찾아낸 것이 아니라 지구의 끝을 건설한 것이다.

바위기둥들의 평균 높이는 300m, 가장 높은 바위기둥은 550m에 달한다. 16세기에는 이 곳에 20여 개의 수도원이 건설돼 수많은 순례자들을 불러모았다고 한다. 수도원 안은 기도실과 예배당·도서관·납골당까지 갖췄으며, 아름다운 프레스코화들이 지금까지 잘 보존돼 있다. 수도원 밖의 난간에 서서 건너편 벼랑 끝에 매달린 수도원을 바라보면 정신이 아득하다. 지척에 둔 저 곳을 이곳에 있는 나는 감히 가지 못한다. 나는 오직 이 위에서 홀로 하늘과 신을 마주해야 한다. 이곳에서 잠들면 나도 불현듯 신의 계시를 받을 수 있지 않을까.

나는 까마득한 낭떠러지 아래의 지구를 내려다 보았다. 그 옛날 수도사들도 가끔은 하늘을 올려다보는 대신 땅을 내려다 봤을까. 갑자기 저 아래 깨알처럼 박힌 무수한 집들과 그 안에서 소란스럽게 살고 있을 사람들이 궁금해졌다. 나는 아름다운 메테오라를 등지고 터덜터덜 걸어내려왔다.

지구는 작고, 둥글고, 그 곳에서의 삶은 그 만큼 별 볼일 없이 시시하고, 여행은 쉽고 지루하다. 하지만 또한 지구는 거대하고, 21세기에도 여전히 그 모양을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신비롭고, 그 삶은 누구에게나 각기 다른 것이어서 놀랍고 특별하며, 여행은 그 모든 비밀을 탐구하느라 끝없이 흥미진진하다. 그래서 나는 다시 가방을 싸고 길을 나선다. 또 다른 곳에 숨어있을 지구의 끝을 향해.

미노(방송작가)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