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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당첨자=김기열(대구 수성구 만촌1동)
다음주 글감은 '송편'입니다.
많은 사연 부탁드립니다.
♥
입추도 지난 지 오래다. 그러나 아직도 이글거리는 한낮의 태양만은 여름의 연장선에 떠있다. 그 덕에 오곡백과는 풍성하게 익어갈 것이고 그 풍성함에 감사하는 한가위도 다가온다.
해마다 이맘때면 그리움의 고향산천에 요란한 굉음들이 메아리친다. 바로 예초기 소리이다.
예전에는 주로 낫과 깔꾸리, 톱 등을 이용하여 벌초를 하였다. 모처럼 고향 가는 낡은 시골버스에는 새끼로 날을 칭칭 감은 낫을 들고 아귀힘 좋을 법한 아들들과 삼삼오오 벌초하러 가는 사람들로 북적이곤 했다. 요즘이야 거의가 자가용을 타고 예초기로 조상님 삭발(?)을 해드리는 것이 일반화되어 시간도 많이 단축이 되었건만, 왠지 낫으로 손가락 베여가며 벌초하던 그 손맛의 매력은 없다.
아버지께서는 배산임수, 좌청룡 우백호의 명당자리를 찾는다고 깊은 산 정상에 할아버지 묘를 쓰셨다. 산소로 가는 길은 벌목도를 들고 헤치고 가야 할 정도로 해마다 숲이 우거져 있지만 우리 삼형제는 아직도 한 해도 그르지 않고 벌초를 하러 간다. 첨에는 왜 이렇게 높은 산꼭대기에 묘를 쓰셨는지 내심 불만도 있었다. 그러나 80을 바라보는 연세에도 벌초만은 직접 해야 된다면서 아직도 낫을 들고 앞장서서 그 험한 길을 가시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조상 섬김의 미덕에 고개가 숙여진다.
작년 벌초 가는 길에는 산중턱에서 제법 굵은 야생 밤을 한 자루 주웠고 덤으로 귀하디 귀하다는 야생 상황버섯을 참나무에서 따는 횡재를 했다. 아마도 할아버지께서 이발을 깨끗이 해준다고 고마워서 손자들에게 주시는 선물인 듯 여기고 잘 달여먹었다.
올해도 벌초를 위해 아버지께서는 우리 삼형제를 비상소집해 놓은 상태다. 아직까지 예초기 담당은 장남인 내가 맡고 있지만 조만간 둘째에게 물려주어야 할 것 같다. 둘째가 작년에 한 말이 귓전에 아직도 맴돈다. "히야! 인자 예초기 내한테 넘가라. 내 언제까지 톱 들고 댕기야 되노?" 아마도 또 둘째는 셋째에게, 셋째는 또 조카에게 그렇게 예초기의 대물림과 함께 벌초는 매년 계속될 것이다.
이승준(대구 북구 팔달동)
♥
매년 음력 7월 마지막 일요일은 문중 벌초일이다. 이날 원근 문중 친척들이 모이면 오십여명이 된다. 낫과 예초기, 괭이 등을 들고 남자들은 산소 벌초를 하고 부인네들은 점심 준비를 한다. 벌초 날은 여름날의 더위가 한창이지만 해마다 되풀이하는 만남의 날이다. 한 조상으로부터 이어져 온 뿌리를 확인하고 일가친척 간의 친목을 다지는 날이 된다. 우리 문중 산은 포항시 죽장면 월평리에 있다. 그나마 요즈음은 예초기로 하니까 빨리 풀을 내릴 수 있다.
또 7월 마지막 일요일 문중 벌초 후 음력 8월 첫 일요일엔 사사문증의 벌초를 한다. 그래서 해마다 두 주의 일요일은 연달아 벌초를 하기 위해 산을 찾는다. 이날은 조부모 아래 친척들의 만남의 하루가 된다. 당숙님들과 종반 간 친척들이 함께 모여 이 산 저 산 흩어져 있는 조상들 산소의 벌초를 하고 점심을 함께 먹는다.
30여년 전 종반간에 문회 모임을 만들고 약간의 기금을 세웠다. 작지만 그 돈으로 문중의 일도 하고 벌초 날 성묘와 점심 준비를 하게 되어 부담이 없다. 문회 관리를 맡은 나는 해마다 유사를 정해 당번 순서를 정하고 문중 벌초의 집행을 총괄하고 있다.
산소를 보살피는 일이 우리대에 끝날 것 같은 걱정을 모두 한다. 젊은 세대들은 산소에 대한 관심도가 자꾸만 낮아지고 있다. 벌초하는 것이 힘든다고 하지만 남의 산에 등산도 다니는데 1년에 한번쯤 조상들이 계신 산에 등산 겸 벌초를 하면 더없이 좋으랴마는 쉽지 않다. 조상의 음덕이 당장은 아니지만 언젠가는 후손들을 위해 행운을 줄 것이라 기대하면 더위도 고단함도 잊을 수 있다. 마음먹기에 따라 조상 산소 벌초 일은 즐거운 하루 휴가를 보내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어제의 문중 벌초로 피로가 쌓여 지쳤지만 다시 예초기를 손질하고, 녹이 쓴 낫도 숫돌에 갈아야 한다. 조부모 아래 성묘 음식은 아내가 늘 맡아 해 주었는데 올여름 멀리 영국으로 여행을 가는 바람에 나 혼자 어떻게 음식을 준비해야 할지 걱정이 앞선다. 그동안 말없이 묵묵히 우리 집안 일에 정성을 쏟아 준 집사람에게 고맙다는 따뜻한 말 한마디 못했다. 미안하기 짝이 없다. 오늘은 꼭 그동안 못했던 고맙다는 말을 하기 위해 국제전화를 해야겠다.
오현섭(군위군 소보면 송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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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30년 전만해도 농어촌엔 농사 지을 한우를 집집마다 한두 마리씩 길렀다. 산천에 풀과 나무가 자랄 틈 없이 가축의 먹이가 되다 보니 온통 민둥산이어서 어릴 적엔 사방 10여리를 매일 뛰어다니곤 했던 시절이 있었다. 연료가 부족해서 소똥을 주워와 풍구를 돌리면서 소죽을 끓인 기억도 난다. 사실 그 시절엔 조상님의 산소에 벌초할 것이 없었다. 각 문중마다 음력 8월 초하루 날에 친인척이 모여서 술과 음식을 나누면서 한여름의 힘들고 고달팠던 농사일의 시름을 잠시 잊었고, 그날만큼은 즐거운 날이었다. 지금은 세월이 많이 변해서 집집마다 조상님 산소 벌초 때문에 한숨을 쉬곤 한다. 젊은 사람은 모두 고향을 떠나고 늙으신 부모님만 고향을 지키는 현실이 되었다.
나의 고향 선영은 마을 앞 야트막한 야산에 좌우상하 선대 순서대로 묘지가 포진해 있다. 선영 여기저기에 30여기의 묘지가 올망졸망 모여 있다. 어릴 적 아버지께서는 이곳의 무덤은 분명 우리 가문과 연고가 있는 무덤일 것이라고 말씀하시며 주위의 무연고 산소까지 벌초하고 추석이면 성묘도 같이 드리곤 하셨다.
아버지께서 고인이 되신 지도 벌써 15년이 되었다. 나도 아버지 생전의 유지를 받아 주위 무연고 묘지를 벌초해오고 있다. 삶을 바쁘게 살다 보면 다소 귀찮은 적도 있었지만 지금까지 큰 어려움 없이 소박하게 살아가는 것도 무연고 묘지의 후덕이라는 생각도 든다.
지난 주말 선영 묘소 벌초를 마쳤다. 올 추석 성묘에도 친척들과 함께 무연고 묘소에도 술잔을 올릴 것이다. 아들, 조카, 손자, 대대손손 이 행사가 유지되었으면 하는 소박한 바람을 가져본다.
김경환(대구 서구 원대3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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