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운동가 천규석(70·대구한살림 이사). 그는 환경주의자다. 아니, 철학자다. 근본주의자이고 원칙주의자이기도 하다. 혹자는 그를 두고 날카롭고 비타협적이며 고집센 이상주의자라고도 하지만, 그를 가장 잘 표현하는 말은 농사꾼이다. 땅을 갈며 살아왔고 사람의 근본은 땅이라고 믿는다. 소농이 중심이 된 자급형 공동체가 인간의 마지막 유토피아라고 믿는다.
그를 만나기 위해 25일 오후 대구 남구 대명9동 '대구한살림' 사무실을 찾았다. 주택가 한 귀퉁이, 유심히 보지 않으면 눈에 띄지도 않을 작은 간판. 빛바랜 문을 열자 쌀, 잡곡, 무공해비누, 죽염 등이 놓인 진열대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허름한 책상 두 개에 여직원 한 명과 그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그는 기자를 사무실에 딸린 방으로 안내했다. 반쯤 남은 싱크대와 작은 탁상이 전부. 정말 아무것도 없다. 빈 방은 작은 목소리도 웅웅 거리며 묘한 반향을 냈다.
◆땅이 싫어 떠났다가, 땅을 찾아 돌아왔다
천규석의 고향은 경남 창녕 영산이다. 일곱 남매 중 장남. 어머니는 그가 중학교 2학년 때 세상을 떠났다. 학창 시절 그가 진저리를 낸 건 다름아닌 농사였다. 중·고교가 농업학교이다 보니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농사에 매달려야 했다. 공부에 사무쳤던 소년은 가출을 감행했다. 인문계 고교로 가겠다며 부산으로 무작정 떠났고, 야간고교 1학년에 입학했다. 생활비·학비를 벌기 위해 과자 공장에도 다니고, 아이스크림 장사도 했다. 하지만 몸이 견디지 못했다. 결국 1년 만에 병을 얻어 집으로 돌아왔고 5년 만에 고교를 졸업했다.
아버지는 장남이 고향에서 면서기를 하길 바랐지만 그는 대학 진학을 결심했다. 2년제 초급대학이던 서라벌예술대(중앙대 예술대 전신) 문예창작과. "문학소년의 꿈 같은 게 있잖아요. 그걸 안 담임교사가 추천을 하니까 촌놈이 뭣도 모르고 지원을 했지." 시인이 되는 꿈을 꾸던 그를 좌절시킨 건 문인이 되는 당시 관행이었다. "김동리, 박목월, 서정주 등 내로라 하는 문인들이 다 교수였다고. 그런데 만나보고 배워보고는 실망을 많이 했죠. 또 자유당 정권 말기에 권력자들 찬양하는 글 쓰는 것을 보고 좌절도 했고." 예술대를 졸업한 그는 서울대 미학과에 다시 입학했다. "예술 철학을 제대로 공부한 뒤에 교수나 평론가가 돼서 문단을 비판하자 하는 객기"가 이유였다. 4·19혁명으로 민주주의 시대가 올 것이라는 믿음은 5·16쿠데타로 무너졌다. 그는 4년 동안 데모로 지새웠다. 1965년 그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1964년 6·3학생운동의 실패가 그의 운명을 갈랐다. "교수의 꿈은 체제에 타협하는 것이라는 생각에 포기했어요. 그리고 정권과 타협하지 않고 독재에 맞서려면 농민운동밖에 없다고 결론을 내린거죠. 농촌이 민중의 뿌리니까."
◆유기농과 대구한살림
고향에 돌아온 그는 농사를 지으며 가톨릭농민회, 경화회 등 농민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사실 그가 처음부터 유기농을 한 것은 아니었다. 1970년대 그 역시 양파 채종 농사에 농약을 사용했다. 그러나 1979년 아내가 암으로 세상을 떠난 뒤 유기농으로 시선을 돌렸다. 화학식 농법은 당장 소출이 늘어 풍요는 있겠지만 지속 가능한 농업이 아니다. 땅을 메마르게 하고 죽게 만들기 때문이다. 땅이 살고, 물이 살고, 후손이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순환하는 공생농이 절실하다는 얘기다. "소출이 적으면 적게 먹으면 되죠. 화학비료와 농약을 쓰는 농업은 우리 세대만 몽땅 쓰고 끝나는 거예요. 후손이 먹고살도록 남겨줘야 도리지."
그가 대구로 온 것은 1988년이었다. 장성한 자녀들은 도회지로 떠났고, 혼자 농사일을 하는 게 힘에 부쳤다. 그에게 지인들은 유기농 농산물을 도시민들에게 직거래로 공급하는 소비자 공동체를 만들 것을 권했다. 1990년 5월 한살림대구공동체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5년 뒤에는 회원 200여명이 내놓은 회비로 경남 창녕군 남지읍 수개리에 땅 2만6천여㎡(8천여평)을 사서 '공생농 두레농장'이라 이름붙였다.
그는 지난 세월을 두고 "부끄럽고 초라하다"고 자평했다. "유기농 운동이 저변은 확산됐지만 단지 직거래 수준이지 우리가 기대했던 도농공동체 수준은 아니에요. 나는 농촌마을이나 농민회가 도시의 사업장, 관공서와 결연을 하고 모든 물품을 직거래하는 것을 지향했거든." 실패한 이유에 대해 물었다. "사회적 분위기가 너무나 비우호적이라는 거지. 당장 농민회마저도 우리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전국농민회총연맹 관계자를 만났는데 '왜 우리가 파는 문제까지 걱정해야 되냐. 농민은 농사만 지으면 되고 유통과 판매는 정부에서 책임져야 하는 것 아니냐'라고 하더라고요. 아니 우리 문제는 우리가 책임져야지. 왜 모든 책임을 국가에 요구합니까. 자꾸 국가에 모든 걸 요구하면 국가의 권력이 커진다고." 그의 목소리가 격앙되기 시작했다. "유럽은 농가에서 키운 농·축산물을 마을 단위에서 직접 가공한 뒤 브랜드화해서 팝니다. 가공은 대기업에 주고 유통은 유통업자에 주면 농민은 예속되고 아무것도 없거든. 그러니 농민은 늘 가난하지."
귀농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은 듯했다. "요즘 귀농은 물 좋고 풍광 좋은 곳에 찾아가는데 그건 전원생활일 뿐이에요." 그러다 보니 농사를 지어야 하는 공생농 두레농장은 IMF사태 직후에 비해 신청자가 크게 줄었다. 지금은 단 한 가구만이 쌀과 콩, 마늘 농사를 짓고 있다. "일단 돈이 안 돼요. 투자 여력이 없거나 농사 경험이 없는 초보는 거의 첫해에 실패를 해요. 그러면 떠나버리지. 또 농사를 지어도 판로가 마땅치 않으니까 제값을 못받는 거죠."
◆나는 타협하지 않는다
-자녀교육과 농민운동 중에 어느 쪽이 어렵습니까?
"딸 셋에 아들 하나를 뒀는데…. 둘 다 어렵죠. 자녀교육이나 농민운동 둘다 성공 못 했으니까. 사실 어릴 때는 아이들이 아버지의 삶의 방식을 이해하지 못했어요. 낭비를 일절 용납않고 돈도 안 주고 그랬거든요. 크니까 이해를 하더라고요. 그래도 때로는 마음이 아파요. 유별난 아버지라서 미안하기도 하고."
-성격이 날카롭고 외골수라는 평이 있던데 동의하십니까?
"부분적으로는 동의합니다. 하지만 내가 비타협적이라서 주변에 사람도 없고, 농장에서 사람들도 떠난다고 하는데 그건 오해예요. 저는 잔소리 안 합니다. 가장 큰 이유는 글 때문이에요. 강의나 글을 쓸 때 비타협적이고 원칙적인 얘기를 하거든. 사실 그건 나자신에게 가하는 채찍이죠."
-진보세력이라 일컬어지는 시민단체에 대해서도 강한 비판을 하시던데요.
"그 사람들은 아예 원칙을 포기한 거죠. 시민단체를 표방하면서 내면적으로 권력을 추구하는 걸 더 못 참겠어요. 아무도 못 건드려요. 이게 정부권력보다 더 무서워요. 정부권력은 국민들이 비판을 가하지만 시민권력은 견제 세력도 없다고요. 이런 비판을 하면 완전히 미친놈 취급을 받아요. "
◆땅이 진리다
-전세계적인 식량 위기를 예견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준비는 무엇일까요?
"식량 자급률을 높이는 게 급선무입니다. 우리나라 식량 자급률은 25% 수준입니다. 선진국 중에서도 가장 낮아요. 일본은 식량 자급률이 45%입니다. 요즘에는 기계화하기 좋은 곳은 농사를 짓고, 환경이 나쁜 곳은 다 묵혀놨어요. 또 농지를 점용한 도로가 너무 많습니다. 필요도 없는 길을 산을 깎고 논을 메워서 평지 길을 만들고 있어요."
-식량 자급률을 높이려면 기업농과 같은 대규모 농업 생산 방식이 유리하지 않나요?
"소농이 훨씬 생산력이 높습니다. 조방농업은 한 사람이 경작할 수 있는 면적은 넓죠. 하지만 생산율은 떨어집니다. 기계가 안 들어가는데는 버리고 수확하면서 3분의 1은 바닥에 버립니다. 소농으로 할 때 단위면적당 생산력을 30~40%는 더 높일 수 있습니다. 민주주의의 근본도 소농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민주주의는 민중민주주의, 자치민주주의거든. 그러면 빈부격차가 줄어야되는데 소농이 해답입니다. 농지 3만3천㎡(1만평) 정도의 소농이면 적합합니다. 모든 이가 농사를 지을 수는 없고 반은 농민이고 나머지는 도시에서 소규모 생산에 종사하는 것. 그래야 민주주의가 된다고요."
-다소 비현실적으로 들리는데요.
"현재로서는 이상주의죠. 하지만 비정규직이나 청년 실업도 소농으로 돌아가면 해결할 수 있습니다. 시장물량주의를 극복하면 '자급자치농업공동체'로 갈 수 있습니다. 물론 이상적인 주장이고 현실화되기 어렵겠지만 부분적으로나마 실현되고 있습니다. 농업은 직거래 등을 통해 판로를 개척하면 회생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 계획은?
"이제 나이도 많고 허리도 다쳐서 농사일은 못해요. 그래서 이제 자급형 마을공동체를 지향하는 문화운동을 하고 싶어요. 글도 쓰고 아이디어도 내고. 또 농촌공동체를 위한 축제나 문화행사를 만들고 싶어요. 지금 각 지역마다 2천여개나 되는 축제는 거의 장삿속이거든요."
그에게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간다면 인생 중에 언제로 되돌아가고 싶은지"를 물었다. 그는 "4·19혁명 직후에서 5·16쿠데타 이전까지"라고 했다. "그때가 내 평생 가장 민주주의다운 세상이었어요. 누구나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던 때였거든. 만약 되돌아가면 내가 사는 공동체에서 내 역량에 맞는 일도 하면 좋겠죠." 그가 꿈꾸는 이상향은 독점과 권력이 없고, 빈부 격차가 없는 발전된 자급형 공동체였다. 만약 그런 세상이 온다면 그 곳은 유토피아일까, 디스토피아일까.
장성현기자 jacksoul@msnet.co.kr 사진·이채근기자 mincho@msnet.co.kr
▦천규석은?
농민운동가, 환경주의자. 대구한살림 이사. 농사가 싫었던 소년은 평생 농민운동을 해왔다. 1965년 서라벌예대와 서울대 미학과를 졸업한 뒤 귀농했다. 농약과 화학비료를 배제한 유기농을 짓고 있으며 소농을 기반으로 한 자급형 자치농촌공동체가 이상향이다.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2대 공동의장을 지냈고, 녹색평론 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 땅덩이와 밥상' '땅 사랑 당신 사랑' '돌아갈 때가 되면 돌아가는 것도 진보이다' '쌀과 민주주의' '유목주의는 침략주의다' '소농 버리고 가는 진보는 십 리도 못가 발병난다' 등 6권의 저서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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