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계산논단] 정치와 종교

계로(季路)가 귀신 섬기는 것에 대해 묻자 공자는 "사람도 섬기지 못하면서 어떻게 귀신을 섬기겠는가"라고 답했다. 계로가 다시 죽음에 대해서 묻자 "삶에 대해서도 알지 못하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느냐('논어(論語)' '선진(先進)')"라고 답했다. 공자가 병에 걸렸을 때 제자 자로(子路)가 기도하기를 청하자 공자는 "그런 전례(有諸)가 있느냐"라고 물었고, 자로가 "뇌사에 '위로는 하늘의 신에게 빌고, 아래로는 땅의 신에게 기도드린다'라고 했습니다"라고 답하자 공자는 "그러면 나는 기도한 지 오래다('논어' '술이(述而)')"라고 말한다. 공자의 기도 대상은 특정 신이 아니라 천지신명이었다. 평소에도 천지신명을 공경하고 경건하게 살아왔는데 어찌 병이 났다고 지금에야 귀신에게 빌겠는가란 뜻이다. 유교(儒敎)의 교(敎)자가 종교가 아니라 공자나 맹자 같은 성현들의 가르침이라는 뜻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도전이 '불씨잡변(佛氏雜辨)'에서 불교의 윤회설·인과설·화복설 등을 비판한 것은 불교 교의에 대한 정확한 이해에 바탕한 것은 아니지만 사후 세계보다는 현생을 중시했던 공자의 관점에 입각한 것이다. 즉 정도전이 '불씨잡변'을 쓴 근본적 목적은 불교의 정치화에 대한 비판에 있었던 것이다. 조선 중기의 문신 차천로(車天輅)의 '오산설림초고(五山說林草稿)'는 고려 수도 개성에만 300여곳 이상의 사찰이 있었다고 전할 정도로 고려는 불교국가였다. 고려 불교는 왕실 및 문신 귀족들과 결탁했는데, 무신정권이 수립되자 불교계가 격하게 반발한 것도 이 때문이다. 명종 4년(1174) 귀법사(歸法寺)의 승려 1백여 명이 무신정권 타도를 기치로 봉기해 수십 명이 죽었음에도 중광사(重光寺)·홍호사(弘護寺) 등의 승려 2천여명이 동문에 모여서 호응하다가 다시 백여명의 승려가 죽임을 당한 것을 비롯해 고려의 승려들이 무신 정권에 격하게 저항한 이유는 왕실과 문신 귀족 중심의 구지배체제를 복귀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이런 현상들 때문에 정도전은 불교를 비판하는 '불씨잡변'을 썼으나 조선 후기 들어 유학이 종교의 위치를 차지하면서 고려 말의 불교보다 더 큰 병폐를 낳았다. 같은 유학의 한 줄기인 양명학까지 사문난적으로 몰렸으니 여타 종교는 말할 것이 없었다. 조선 후기 정권에서 소외되었던 소론을 중심으로 양명학이 연구되고, 역시 정권에서 소외된 남인들을 중심으로 천주교가 서학이란 이름으로 수용되는 것은 이런 체제에 대한 반발이었다. 병자호란 때 인질로 잡혀간 소현세자가 인조 22년(1644) 북경에서 예수회 선교사 아담샬을 만나 천주교를 접하면서 귀국할 때 가지고 왔던 천주교 서적들이 남인가에 전해지면서 자생적인 천주교도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이들을 서학을 신봉하는 무리란 뜻에서 신서파(信西派)라고 불리는데 성리학을 종교로 만든 노론은 천주교를 사학(邪學)이자 사교(邪敎)라며 극심하게 탄압했다. 천주교에 동정적이었던 정조는 탄압을 거부했지만 정조가 사망한 이듬해인 순조 1년(1801) 수렴청정하던 대비 정순왕후가 천주교를 역률로 다스리라는 교서를 반포하면서 정약용의 형 정약종을 비롯해 이가환, 이승훈 등 수많은 남인계 인사들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신유(辛酉)박해가 발생했다. 헌종 5년(1839)의 기해(己亥)박해·고종 3년(1866)의 병인(丙寅)박해 때도 수많은 신자들이 목숨을 잃었다. 공자의 가르침(敎)을 버린 교조적 주자학자들이 천주교를 극심하게 탄압한 이유는 정권을 독점적으로 유지하기 위함이었다. 이런 주자학 신성(神性)국가가 경쟁력을 갖출 수는 없었던 것은 당연한 것이어서 유학의 종교화는 유학 자신도 망치고 나라도 망치는 최악의 결과를 낳았던 것이다. 종교든 이념이든 세상을 선악(善惡)으로 나누면서 자신들이 선(善)이라고 생각하는 세력이 집권하면 세상은 객관적인 지옥이 된다. 현 정권 등장 이후 불교계가 종교차별이라며 강하게 반발하고 있는 것은 어느 모로 보나 불행한 일이다. 차제에 어떤 종교를 막론하고 공무원의 신봉 종교가 국정에 일절 영향을 미치지 못하도록 하는 특단의 대책이 수립되어야 할 것이다.

이덕일(역사평론가)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