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벌초

경기도 구리시의 동구릉에는 조선 태조 이성계의 왕릉을 비롯해 조선조 9陵(릉) 17位(위)의 왕과 왕비'후비의 幽宅(유택)이 있다. 그 중 태조의 건원릉에는 다른 능과 확연히 다른 점이 있다. 봉분의 떼가 억새라는 점이다. 아버지와의 갈등이 깊었던 태종은 고향 함흥에 묻히길 원하는 태조의 유언을 두고 고민 끝에 한양 근처인 지금의 동구릉에 안장하되 함흥의 억새로 떼를 입혔다. 600년이 흐른 지금껏 이어지는 건원릉의 억새는 일 년에 단 한 번 伐草(벌초)를 한다고 한다.

해마다 설'추석 명절이면 민족 대이동이 일어난다. 특히 추석 때는 보름쯤 앞서부터 큰 이동이 있다. 바로 벌초 행렬이다. 지난 주말에도 벌초 차량들로 고속도로가 심한 체증을 빚었다.

이와 함께 매년 이맘때면 연례행사처럼 벌초 사고가 일어난다. 가볍게는 풀독이 올라 따끔거리는 정도에서부터 땅벌이나 말벌에 쏘여 큰 고생을 하거나 심지어 사망하기도 한다. 독이 바짝 오른 가을뱀에 물리기도 하고 날카로운 예초기에 사고를 당하며, 쓰쓰가무시 같은 진드기나 들쥐로 인한 전염병에 걸리기도 하고, 산중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 사망하는 일도 있다. 지난 주말에도 대구 달성군에서 40대 남자가 선산 벌초 중 말벌에 쏘여 사망했는 등 전국 각지에서 30여 건의 벌초 사고가 잇따랐다.

그러고 보면 벌초에는 갖가지 위기 상황이 도사리고 있음을 보게 된다. 자신의 목숨과도 바꿔야 할 경우도 있다. 그럼에도 매년 추석이면 이 연례행사로 전국이 들썩거린다.

벌초는 여름 동안 무성하게 자란 무덤의 잡풀을 베어 깨끗하게 손질하는 행위를 말한다. 조상과 먼저 떠난 가족의 유택을 돌보는 아름다운 관습이다. 유체가 묻힌 곳에 그들의 혼도 머물러 있다고 믿는 데서 비롯된다. 때문에 벌초는 조상에 대한 효성, 먼저 간 혈육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의 표시이기도 하다. 그런 까닭에 추석 성묘 때 더러 잡풀이 제멋대로 우북하게 자라난 무덤을 보면 '불효 자손들을 두었나' 싶기도 하고, 남의 묘일망정 마음 한쪽이 씁쓸해지는 것이다. 하기야 요즘은 벌초대행업체도 우후죽순처럼 생겨나 時流(시류)가 많이 달라진 듯도 하다. 납골묘'수목장 등의 증가 추세에 따라 봉분 있는 무덤이 점차 줄어들고 있다. 머지않아 '벌초' 자체가 아득한 옛이야기로 남을지도 모르겠다.

전경옥 논설위원 sirius@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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