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의 무더위를 견딘 들녘의 경치를 감상하며, '판화 기획전'이 열리고 있는 시안미술관을 다시 찾았다. 호수처럼 넓은 사일못을 지날 때 너른 수면 위를 건너오는 바람이 영락없는 가을을 알리는데, 지난여름과는 또 달라진 풍광들이 새롭다. '판화, IN THE SPACE'란 부제의 이번 전시회는 판화라는 장르에 포함시킬 수 있는 현대판화의 다양한 기술과 기법들을 한자리에 모아 본다는 취지 아래 마련됐다. 판화의 전통이나 기능의 변화를 함께 이해하도록 우리 고목판본의 실례들을 함께 전시하고 있으나 역사적 전개나 기술의 추이를 일목요연하게 살필 수 있기에는 그 규모가 미미한 정도여서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다. 하지만 때마침 독도를 주제로 열렸던 서울의 한 판화전을 유치하여 이 매체가 지닌 다양한 표현의 잠재성을 확인하기에 충분해서 그 아쉬움을 채워준다. 18명에 이르는 전국을 망라한 유명 작가들의 개성을 판화작품을 통해 감상하는 일이라 즐겁다.
본전시에 초대된 14명의 대표적인 작가들이 제시하는 개성적인 작품들은 현대판화의 확대된 표현영역을 집약해서 보여준다. 재료나 기술의 범위가 너무 넓혀져 어떤 장르개념도 표현의 경계가 될 수 없게 된 현대예술의 특징을 여기서도 실감케 한다. 다양해진 종류와 특징들을 총체적으로 보여준 대규모 전시가 올 초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개최했던 '한국현대판화 1958-2008전'이나 '서울국제판화제' 등이었는데 역시 지역에서는 보기 쉽지 않은 전시들이었다. 대구를 중심으로 이 지역에도 일찍부터 우수한 판화작가들이 많았고 또 판화에 대한 일반 작가들의 관심도 높아서 판화운동에 실천적으로 참여한 작가들이 다수 있었던 사실을 감안하면 앞으로 더욱 규모 있는 후속전시들이 이어졌으면 싶다.
판화는 하나의 원판으로부터 동일한 다수의 작품을 복제해내는 수단으로서 각광받을 뿐만 아니라 일찍부터 서양에서는 단 한 점뿐인 원작을 재현하는 기능 면에서 아주 유용한 매체였다. 망실되고 없어진 원작의 내용이 재현된 당시의 판화를 통해 전해오는 경우가 그렇다. 그러나 손으로 그린 그림을 볼 때는 붓질의 빠르기나 강도, 제스처나 동작의 크기, 물감의 두께나 묽기 등에서 화가의 다양한 내적 표현까지 느끼게 되지만 판화에서는 기계에 의한 프린팅 과정이 작가의 직접적인 손길을 감해버린다. 전통적인 개념의 '아우라'가 제거된다.(그래서 앤디 워홀은 이런 프린트물 위에 다시 붓 터치를 가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불만이 오히려 현대의 미술문화에 더 적합한 양식으로 받아들여질 필요성을 깨닫게 한다. 소수가 독점할 수밖에 없는 기존의 예술 생산방식에서 다수가 소유할 수 있는 제작방식의 도입이라는 기술상의 변화를 적극적으로 채택함으로써 예술의 민주화를 실현시킨다. 문제는 복제기술을 예술작품의 질을 떨어뜨리는 평준화가 아니라 새로운 예술성의 탐구로 전환시키는 지점에 있다. 개방되고 확대된 판화의 제작기술은 원화를 대체하려는 복제물이기보다 복제과정 그 자체에서 독자적인 미적 가치를 탐색하는 예술이다.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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