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익명의 자선

諸子百家(제자백가)의 하나인 墨家(묵가)의 창시자 墨子(묵자)는 혼란한 사회를 바로잡는 데는 儒家(유가) 사상만으로는 희망이 없다고 여겨 兼愛(겸애)사상을 내놓았다. 인간에게는 겸애와 別愛(별애)가 있는데 겸애는 남을 위하는 애타심, 별애는 자신만을 위하는 이기심을 뜻한다고 했다. 별애로 인해 도둑질, 싸움질, 전쟁 등이 일어난다고 본 묵자는 별애를 없애는 방법으로써 겸애를 역설했다.

반면 楊子(양자)는 극단적 개인주의인 '爲我說(위아설)'을 주장했다. '머리카락 하나로써 천하를 이롭게 한다 해도 결코 이를 희생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묵자의 겸애설을 인간 본능을 무시한 비인간적 주장으로 파악, 인간 본래의 순수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자기를 귀히 여겨야 한다고 했다.

정도의 차는 있겠으나 사람의 심성엔 이타심과 이기심이 다 들어있다. 이 둘은 끊임없이 줄다리기를 한다. 이타심이 강하면 이기심은 약해지고, 이기심이 커지면 이타심은 줄어든다. 물질로 남을 돕는 일도 대개는 자신에게 돌아올 유무형의 반대급부가 더 클 때 지갑을 연다.

하지만 세상에는 이런 셈법을 떠나 무조건적으로 주기만 하는 사람들도 있다. 추석을 앞두고 한층 얇아진 호주머니 사정으로 한숨 쉬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이때 어려운 이웃들에게 조건없이 사랑을 전하는 '키다리 아저씨'가 있어 화제다. 2일 수성구민 운동장에 쌀 10kg짜리 1천포를 놓고 간 89세의 할아버지. 6년째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이어지는 선행의 주인공이다. 한국전쟁 때 피란 와 대구에 정착, 양복지 도매상을 했다는 정도만 알려졌을 뿐 이름 밝히기는 극구 사양하고 있다 한다.

미국 여류 작가 J.웹스터의 소설 '키다리 아저씨(Daddy Long Legs)'에 등장하는 익명의 독지가는 문학에 소질 있는 고아 저류샤가 작가로 성장할 수 있도록 4년간 장학금을 대주면서도 결코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우연히 그의 그림자를 본 이후 저루샤는 편지를 통해 '키다리 아저씨'라는 별명으로 부른다.

어려운 이웃을 위해 거금을, 그것도 익명으로 내놓은 할아버지는 160cm도 안 되는 작은 키지만 훈훈한 온정은 소설 속 키다리 아저씨를 빼닮았다. 소득공제 혜택이니 홍보효과를 노린 '제사보다는 젯밥'식 기부가 늘어나는 세태에 모처럼 감동을 주는 미담이다.

전경옥 논설위원 sirius@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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