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계산동에서] 교육 고통의 범인들

"욕 좀 하고 싶은데 어디 전화할 데 없냐? 교육비는 밑도 끝도 없이 들어가는데 어디 가도 모두 상전이니 너무 억울하다."

모처럼 만난 한 선배는 가슴을 쳤다. 새 정부 들어서도 높아지기만 하는 학부모의 교육 고통지수 때문인 듯했다.

상반기에 우리나라 가정에서 지출한 교육비가 15조원을 넘었고 가계 소비지출 가운데 교육비 비중이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는 통계보다 '그런데도 우리 아이 성적은 왜 안 오르나?'하는 억울함이 더 고통스럽다고 했다.

술·담배도 끊고, 옷값도 줄이고, 오락·문화비까지 줄여 올라가는 학원비를 감당하고 있지만 "학교에서 배우는 걸 왜 학원에 보내야 하나"라고 원망하기는커녕 아이의 학원 수업에 따라가기 위해 과외까지 시켜야 하는 황당한 '소비자 무시' 현실에 속이 상한다고 했다.

문제는 이러한 고통의 상승곡선이 좀체 떨어질 줄 모른다는 사실이다. 이유는 분명하다. 엉뚱한 사람들이 엉뚱한 데서 해법을 찾기 때문이다.

흔히 초·중·고교와 대학이 범인으로 몰리지만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주범은 국가다. 학교 교육이 황폐해지고 사교육비가 늘어나는 건 대학입시 경쟁의 과열에서 비롯된다. 경쟁의 온도를 끝없이 높이는 건 국가 주도의 획일적인 교육과정과 서열화한 대학, 이를 기반으로 하는 뗌빵식 입시제도다.

그럼에도 국가가 과열 경쟁에 개입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식민주의·독재주의 사고는 정권의 속성이 어떠하고 집권세력의 철학이 무엇인지와 관계없이 지속돼왔다. 이명박 정부 역시 대입 자율화와 고교 다양화를 내세웠지만 근원적으로 국가 주도라는 틀은 벗어나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새로운 제도는 기껏 지난 제도에 맞추고 익숙해지는데 들어간 사회적·개인적 비용을 무용하게 만들어버린다. '입시제도 아무리 잘 만들어도 1970년대 본고사 방식보다 못하다'는 교육계의 속설이 왜 나왔는지 집권세력들이 한번이라도 관심을 기울였다면 국민들의 고통은 이만큼 되풀이되지 않았을 것이다.

국민들의 비난과 분노에서 벗어나 있지만 국가 못지않게 국민의 고통 증가에 역할을 한 이른바 從犯(종범)으로 지방자치단체를 지목하고 싶다. 교육에 관해서는 아무 권한도 없고 어떤 일도 할 수 없는 지방자치단체에 무슨 잘못이 있느냐고 항변해서는 곤란하다. 지역민들의 행복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하는 소임에 지역민들의 최대 관심사인 교육을 빼놓은 건 책임 방기다.

우리나라는 교육자치가 이루어지고 있지 않으냐, 교육감 직접선거도 시작되지 않았느냐고 하는 건 무지의 소치다. 지방자치단체와의 연계를 잃은 교육과학기술부 내의 자치는 한계가 너무나 분명하기 때문이다. 얼마 전 당선된 서울시교육감에게 고교평가와 퇴출, 교사평가를 요구하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사정은 그리 녹록하지 않다.

미국 뉴욕시의 경우 블룸버그 시장이 공교육 살리기에 팔을 걷어붙인 것으로 유명하다. 1천200여개의 공립학교를 종합평가해 A에서 F까지 등급을 매기고 성적에 따라 파격적인 인센티브를 부여하는 것부터 폐교 조치에 이르기까지 과감한 개혁을 단행했다.

당장에 미국, 일본 수준의 교육자치를 전면 실시하라고 요구하는 게 아니다. 학군 때문에 빚을 내 이사를 가고, 위장전입을 하는 시민들의 고통을 내 일 아니라고 외면하지는 말자는 얘기다. 문화체육관광국에 교육협력계 하나 만들어놓은 대구시나 시청에 직원 3명 파견해놓은 대구시교육청이나 국가만 바라보고 있지는 말자는 얘기다.

김재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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