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책]애틋함의 로마

'스캔 인간'이라도 운명은 결국 같다

복거일 지음/문학과 지성사 펴냄

'사랑스러운 이와 함께 건넌/ 그 흐린 시간의 강물/ 지금은 어디쯤 흐르나/ 우리가 안은 운명의 발길이야/ 가볍게 만나고/ 더 가볍게 갈라지지만/ 아, 이제 우리는 아네/ 모든 사랑의 발길은/ 애틋함의 로마로 통한다는 것을/ 기억하라, 기억하라/ 젊은 날의 풋풋한 사랑을/ 어쩌다 찾은 철 지난 사랑을.'

2832년, 마이크는 이롱고스 전투에 용병으로 참가했다. 중대원 92명 가운데 생존자는 23명. 이들의 싸움은 승리와 생존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임무는 이스트 개니미드가 전열을 정비하도록 시간을 버는 것이었다. 그들은 모두 죽게 돼 있었다.

당시 전투에 참가했던 용병들은 모두 육신을 스캔해서 남겼다. (현대에서 사진을 스캔해서 원본과 똑같은 사진을 보유하듯, 미래에서는 사람을 스캔해 그와 똑같은 사람을 남길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 20세 남자 아무개를 스캔했다면, 새로 만들어진 사람은 20세 남자 아무개와 같은 육신, 같은 기억을 갖는다. 그러나 스캔으로 육신화된 후의 삶은 원본과 다르다.)

전투가 끝나고 '육신화 부서'는 스캔 자료를 바탕으로 죽은 자를 육신화했다. 그러나 실수로 이 전투에서 살아남은 마이크의 스캔 역시 육신화돼 '마이키'가 탄생한다. 원본인 마이크는 스캔인 마이키의 대학학비를 대준다. 마이키가 명문대학을 졸업했을 때 자신이 이루지 못한 무엇을 아들이 이룬 듯한 감상에 젖기도 했다.

대학 졸업을 앞둔 마이키가 연인을 데리고 나타났을 때 나(마이크)는 가슴이 멎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마이키 옆에 나란히 선 여인은 내가 사랑했던 여자 소니아였다. 정확히 말하면 토성계 유람선 추락 사고로 남편과 함께 숨진 소니아의 스캔이었다. 스캔 소니아는 원본 소니아와 같은 목소리, 같은 피부, 같은 얼굴, 같은 마음씨를 가졌다. 그러나 대학에서 전공이 달랐기에 스캔 이후 습득한 지식은 달랐다.

마이크는 자신이 이루지 못한 사랑을 두 스캔이 이루기를 소망했다. 그러나 스캔인 마이키 역시 연인 소니아와 헤어지고, 그 슬픔을 달래기 위해 용병으로 전쟁에 참가하고 죽는다. 마이크와 마이키 두 사람은 운명적으로 혹은 기질상 비슷한 삶을 살아야 하는 모양이다.

나(마이크)는 독백한다.

'내 젊은 날의 사랑은 두 번의 이별로 끝났다. 결국 마이키(나의 스캔)와 소니아(내 연인의 스캔)는 헤어졌다. 두 사람은 소니아의 고향이자 우리가 작별했던 화성의 작은 도시에서 헤어졌다. 그리고 소니아(스캔)는 소니아(내 연인이자 원본)의 남편 스캔과 결혼했다. 이제 나는 알았다. 내 젊은 날이 다시 육신화 된다 해도 소니아를 얻을 수 없다는 것을. 나로서는 어찌해볼 도리 없는 무슨 힘이, 무슨 운명의 손길이, 해독할 수 없는 신탁처럼 그녀와 나를 갈라놓는 것이다. 나의 간절한 응원에도 불구하고 마이키는 결국 나와 같은 길을 걸어 사랑하는 여인과 헤어진 것이다.'

슬프게도 우리(나와 마이키)에게는 우리의, 그녀(소니아와 그녀의 분신)에게는 그녀의 길이 따로 있었다. 우리는 나름으로 애썼다. 다른 분지를 향해 흐르는 물길을 돌리려고 애썼다. 그러나 물길을 돌리지 못했다. 우리가 아무리 애를 써도 운명을 돌이킬 길은 없었다. 우리가 애써서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운명이 따로 있다'는 사실뿐이다. 애쓰지 않았다면 그것이 운명이라는 사실을 확인하지 못했을 것이다.

철학과 신화에 무게를 둔 많은 문학작품은 이렇게 말한다. '운명에 저항하고 몸부림친다고 운명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상처가 깊어질 뿐이다. 우리가 몸부림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운명의 가혹함 뿐이다.'

많은 문학 작품이 철학과 신화에 무게를 두고 있다면 복거일은 과학과 미래에 무게 두기를 좋아한다. 복거일은 이전에도 과학에 근거를 둔 작품을 여럿 썼다. 정통 문학은 흔히 '나는 누구인가?' 묻는다. 그리고 과학을 통해 우리는 모르던 것을 하나씩 알아간다. 그래서 우리는 때때로 먼 훗날 과학이 고도로 발달하면 '나는 누구인가, 아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고 기대한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과학과 미래에 무게를 둔 복거일의 작품 역시 같은 질문을 하고 있다.'나는 누구인가?' '사람은 무엇으로, 왜 사는가?'

사람들은 로봇인간은 '내가 누구인가' 고민하지 않을 줄 알았다. 그런데 기계 단계를 지나 인간과 유사한 수준에 달하자 로봇들도 '내가 누구인가?' 질문한다(이번 소설집에 묶인 '내 얼굴에 어린 꽃' '내 몸의 파편들이 흩어진 길 따라')는 점은 의미하는 바가 크다.

철학과 신화에 무게를 둔 많은 문학작품과 과학에 무게를 둔 복거일 작품에 등장하는 '운명'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신체의 관성'일 듯하다. 신화는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어쩔 수 없는 운명을 따라 걷는다고 말한다. 복거일의 이 작품은 '타고난 운명'뿐만 아니라 '신체'가 이미 관성적으로 지향하는 길이 따로 있다고 말한다. 내가 소니아를 만나 사랑하고 헤어지고, 용병이 되었듯 나의 스캔 마이키 역시 소니아(스캔)를 사랑하고 헤어지고 용병이 된다는 점이 그렇다.

아무리 애를 써도 운명은 돌이킬 수 없다. 운명에 저항해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운명을 돌이킬 수 없다'는 사실과 슬픔뿐이다. 그래서 나, 마이크는 이렇게 노래한다.

'기억하라, 기억하라/ 젊은 날의 풋풋한 사랑을/ 어쩌다 찾은 철 지난 사랑을….'

가질 수 없고, 바꿀 수 없고, 돌이킬 수 없다면 기억하고 또 기억하며 미소 지어야 한다. 운명은 우리의 저항을 용납하지 않았지만, 우리가 '지난날의 사랑'을 기억하며 미소 짓는 일을 금하지도 않았다. 운명이 날카롭게 베고 간 상처에서 우리는 추억을 발견한다. 그리고 미소 짓는다.

소설집 '애틋함의 로마'에는 10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이 중 7편이 2029년부터 2998년까지 미래를 배경으로 한다. 인공수정을 통한 출산과 그 가족을 배경으로 한 '서울, 2029', 지놈 합성문제를 다룬 '꿈꾸는 지놈의 노래', 생명공학을 바탕으로 영생의 꿈을 실현한다는 '기적의 해', 암살을 막기 위해 로봇 대통령이 사람을 대신해 유세하고 임기를 마치는 '대통령의 이틀' 등은 모두 미래소설이다. 작가는 모든 것이 얼어붙은 땅, 풀이 자라지 않는 시간, 사람이 살 수 없는 마른 잿더미에도 애틋함이 있다고 말한다. 301쪽, 1만원.

조두진기자 earf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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