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기타리스트 최이철 "'사랑과 평화'는 대구서 생겨났어요"

신중현과 함께 한국 양대 기타리스트로 불리는 최이철.
신중현과 함께 한국 양대 기타리스트로 불리는 최이철.

1968년 7월 AFKN의 한 프로에 16세 소년이 자기 키만한 기타를 메고 나왔다. 그는 현란한 핑거링으로 지판(指板)을 요리하기 시작했다. 웨스 몽고메리(Wes Montgomery)곡 연주가 끝나자 청중의 환호가 홀을 메웠다. 이 박수는 단순한 갈채가 아니라 우리나라에 펑키(Funky) 대부의 탄생을 알리는 서막이었다. 그가 바로 기타 신동으로 불리며 각종 화제와 기록을 남긴 최이철이다.

최이철 하면 일반인들에게는 다소 생소한 이름이다. '사랑과 평화'의 리드기타이자 보컬, '한동안 뜸했었지', '장미'를 만든 사람이라고 하면 올드팬들은 금방 알아챌 것이다. 인기와 사랑을 받은 그룹인 사랑과 평화의 모태가 바로 대구다.

"1970년대에 대구백화점 옆 '이브'라는 클럽에서 활동하던 때였어요. 거기서 김명곤, 김태홍을 만나 그룹을 결성했죠. 이후 이근수가 합세해 1977년 '사랑과 평화'의 조합이 완성됐습니다."

이 그룹은 팀 컬러가 워낙 뛰어난 때문에 음악계의 주목을 받았고 유명세 덕에 활동무대를 바로 서울로 옮겨갈 수 있었다.

이후 '딱 꼬집어 얘기할 수 없어요', '어머님의 자장가' 등 수많은 곡을 히트시키며 70년대 대중음악의 중심에 우뚝 자리 잡았다. 록과 클래식을 접목한 파격적인 실험도 이때 행해졌다. 그때의 혼과 열정이 녹아있는 '사랑과 평화' 1집은 우리나라 대중음악 100대 명반 중 12위에 랭크되어 있다.

이런 업적과 재능에도 불구하고 일반인들에게 최이철은'신중현, 들국화, 산울림보다 평가절하된 면이 없지 않다. 그럼에도 스타들의 명멸이 유난히 짧은 한국 대중음악계에서 최장수 밴드의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그리고 60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장르를 넘나드는 그의 실험은 계속되고 있다.

"솔직히 전 음악 외엔 할 줄 아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저 영감이 떠오르면 곡을 쓰고 무대가 생기면 올라가 연주를 할 뿐이죠."

그의 어눌함과 비사교적인 성격은 그의 멀티 엔터테이너로의 진입을 막았지만 한편으로 곁눈 팔지 않고 연주와 작곡에만 전념케 한 동력으로도 작용했다.

대구를 떠나온 지 30년. 그는 지금도 향촌동, 동성로, 미군부대 근처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음악 열정을 불태웠던 추억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고 했다.

한상갑기자 arira6@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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