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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과 봉사 평생 실천…금복주 창업 김홍식 회장 별세

▲ 대구경북 경제계를 이끌어왔던 대표적 기업인인 김홍식 금복주 회장이 9일 오후 별세했다. 금복주를 국내에서 손꼽히는 주류 메이커로 키운 것은 물론, 지역 경제계 화합을 위해서도 힘써왔던 고인은 대구경북 경제계의 큰 별이었다. 사진은 2003년 12월 17일자 매일신문 인터뷰 때.
▲ 대구경북 경제계를 이끌어왔던 대표적 기업인인 김홍식 금복주 회장이 9일 오후 별세했다. 금복주를 국내에서 손꼽히는 주류 메이커로 키운 것은 물론, 지역 경제계 화합을 위해서도 힘써왔던 고인은 대구경북 경제계의 큰 별이었다. 사진은 2003년 12월 17일자 매일신문 인터뷰 때.

대한민국 산업화를 이끌어왔던 대구경북 경제계의 '큰 별'이 졌다.

㈜금복주 창업자로서 대구상공회의소 회장을 지내며 지역 경제계를 이끌어왔던 김홍식(金泓殖) 금복주 회장이 9일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1세.

1927년 안동군 길안면 송사2동 느릅실에서 태어난 고인(故人)은 서울 경성공업학교를 나온 뒤 상주군청 공무원, 주정회사 직원 등을 거쳐 1957년 대구 달성동에서 금복주를 창업, 국내 대표적 주류 메이커로 키워냈다.

대다수 지방 주류회사들이 수도권 본사 대형업체들에 밀려 고전하는 가운데 금복주만이 지역에서 수도권 본사 주류회사에 결코 밀리지 않는 시장점유율을 현재도 갖고 있는 것은 고인이 뿌린 씨앗의 결실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고인은 희수(喜壽·77세)를 맞기 직전이었던 2003년 12월 16일 대구 성서산업단지내 금복주 본사 회장 집무실에서 매일신문과의 단독 인터뷰를 통해 "1970년대 초반 전국에 413곳의 주류 회사가 있었는데 금복주 등 10곳만 살아남았다. 금복주의 기술력을 인정받은 당연한 결과였겠지만, 사람이 먹는 것이니만큼 첫째도 위생, 둘째도 위생을 강조한 덕분이었다"고 했다. 정도경영을 평생의 철학으로 삼았고 이를 밑거름으로 금복주가 탄탄하게 성장해왔다는 것이다.

고인은 나눔 경영에도 열심이었다. 2003년 12월, 고인이 언론매체에 마지막으로 등장했던 매일신문 인터뷰는 '나눔' 때문이었다.

고인은 그해 희수잔치를 위해 가족들과 회사가 큰 돈을 모았다는 얘기를 듣자 손사래를 치며 모인 돈 1억원을 모두 복지단체에 기부해버렸다. 대구경북지역 복지시설 34곳에 이 돈이 돌아갔다.

고인은 당시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노인네 잔치하는데 1억원이라니, 나 참…"이라며 혀를 찼다.

'이윤을 좇는' 기업인이었지만 고인은 평생을 나눔과 봉사의 삶으로 일관해왔다. 금복문화재단과 금복장학재단, 금복복지재단을 만들어 금복주가 만든 이윤을 지역사회에 환원했다. 단일 기업이 3개의 재단을 만들어 문화·장학·복지사업에 기여하는 것은 보기 드문 일이다.

일관된 기부의 삶에 대해 이의를 다는 직원이 있으면 "오늘의 금복주가 존재하는 이유는 우리가 잘나서가 아니라 지역사회가 후원했기 때문"이라며 사회환원을 계속했다.

고인은 지역사회가 필요하면 언제나 달려갔고, 주머니를 터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1982년부터 88년까지 대구상공회의소 회장(11·12대)을 지내며 대구 상공인들의 화합을 통한 지역 경제 발전을 이끌어냈다. 또 91년엔 대구시의회 초대 시의장에 당선돼 지방의회 발전의 초석을 닦았으며 시의장 임기를 마치면서는 사재였던 화원동산(18만5천124.8m²·5만6천평)을 시민의 휴식처로 삼아야 한다며 대구시에 헌납, 시민들로부터 큰 찬사를 받았다.

1996년 국민훈장 동백장과 국무총리 표창을 받았고, 2000년엔 서울대 경영대학원(고인은 1971년 서울대학교 경영대학원을 수료했다) 총동창회로부터 자랑스러운 경영인 대상을 수상했다.

유족으로는 금복주 사장으로 있는 장남 동구씨 외에 2남 4녀가 있으며 빈소는 경북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다. 발인은 12일(금) 오전 7시다.

최경철기자 koala@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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