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웃사랑)루게릭병과 싸우는 김분남씨

▲ 눈 깜빡임만으로 의사표현을 해온 지 4년째지만 김분남씨가 흘리는 눈물은 더없이 따뜻했다. 남편이 쉬는 낮시간에 요양보호사가 김씨를 돌보고 있다. 김태형기자 thkim21@msnet.co.kr
▲ 눈 깜빡임만으로 의사표현을 해온 지 4년째지만 김분남씨가 흘리는 눈물은 더없이 따뜻했다. 남편이 쉬는 낮시간에 요양보호사가 김씨를 돌보고 있다. 김태형기자 thkim21@msnet.co.kr

"(고맙다…)"

눈 깜빡임 몇번에 2분이 넘게 걸렸다. '고맙다'는 말 한마디를 위해 구부정한 허리의 남편은 글자판에 일일이 손가락을 갖다대야 했다. 부인은 남편의 눈과 글자판을 번갈아 보며 눈을 깜빡였다. 오른쪽 뺨이 미세하게 떨렸다. 안면 근육을 움직이고 싶지만 말을 듣지 않아서였다. 4년째 병상에 누워 오로지 눈으로만 자신을 표현하는 부인의 마음은 과연 남편에게 제대로 전달될까.

"고맙다고 하네요."

손에 힘이 풀린 듯 남편이 쥐고 있던 글자판이 방바닥에 툭 떨어졌다. 'ㄱ, ㄲ, ㄴ' 순으로 자음과 'ㅏ, ㅑ, ㅓ' 순으로 모음이 구분된 글자판은 그간 얼마나 대화를 시도했는지 알 수 있을 정도로 닳아있었다. 눈물을 찍어내던 남편은 "다시 일어날 거라 믿는다"고 했다. 4년째 이 말을 되풀이하면서도 질리지 않는다는 남편. 순간 부인의 얼굴이 붉어지더니 눈물이 끝도 없이 솟구쳤다.

대구 중구 남산동 자택에서 만난 이율이(63), 김분남(60)씨 부부는 눈으로 서로를 표현하고 있었다. '루게릭병'으로 불리는 근위축성측색경화증은 척수신경이나 간뇌의 운동세포가 서서히 파괴돼 결국 움직일 수 없게 되는 병이다. 현재 김씨가 할 수 있는 것은 눈 깜빡임이 전부다.

김씨가 자신의 병을 알게 된 건 2002년 가을. 목소리가 갑자기 변하기 시작했다. 평소 내성적인데다 목소리가 미성이었던 김씨의 목소리는 술에 취한 사람처럼 변했다. 전화 통화를 한 사람은 열이면 열 "술 마셨냐"는 말부터 꺼냈다. 당시 축농증으로 병원에서 수술을 받은 터라 이씨는 병원에 항의했다. 수술이 잘못돼 아내의 목소리가 사라졌다며 호통도 쳤다.

무지의 결과라는 걸 안 건 종합병원 검진을 받은 뒤였다. 처음 들은 '루게릭병'은 그렇게 사람의 목소리만 앗아가는 줄 알았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래서 운동도 열심히 했지만 김씨의 근육은 하나씩 말을 듣지 않았다.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 김씨를 낫게 하겠다고 한방에 의지하기 시작했다. 유명하다는 전국의 한의원을 모두 다녔다. 실제 김씨는 한의원에서 침을 맞을 때마다 몸을 조금씩 들썩였다고 했다. 그래서 희망을 버릴 수 없었노라고 했다. 2004년부터 완전히 누워버린 김씨를 데리고 그렇게 돌아다닌 지 3년. 지금까지 이씨 부부가 떠안은 빚만 4천여만원이다.

두 부부가 의지하고 있는 은행 통장을 들췄다. 국민연금 16만2천원, 장애수당 19만원, 생계보조 비용 34만6천원. 한달에 70만원 가까운 돈이 생활비의 전부였다. 두 사람이 사는 데 큰 문제는 없어보였지만 루게릭병이 그렇게 값싼(?) 질병은 아니었다.

비급여부분 약재와 기저귀, 식사대용품 캔 구입 등 한달에 최소 120만원 정도가 필요한 상황. 또 집에서 인공호흡기로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김씨에겐 24시간 간호가 필요하다. 노인장기요양보험 1등급으로 분류돼 낮시간대에는 요양보호사의 간호를 받을 수 있지만 밤에는 이씨의 몫이다. 밤낮을 바꿔 사는 이씨의 얼굴은 푸석푸석했다.

아들과 딸은 최근 들어 모두 "네 갈 길로 가라"며 내보냈다는 이씨. 지난 4년간 어머니의 간호에 매달렸지만 허사였기 때문이다. 이씨는 그런 아이들을 붙잡아둘 수 없었다고 했다. 강제로 내보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산 송장들 사이에 피끓는 애들을 내버려둘 수 없었어요."

말을 하며 헐떡거리는 이씨도 천식을 앓고 있었다. 호흡기 장애로 장애등급 3급을 받았지만 부인 김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다. 거실 겸용 이씨의 방에는 가족 사진이 걸려 있었다. 딸의 대학 졸업식때 찍은 사진에서 이씨와 김씨는 지금과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김태진기자 jin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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