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영주풍기인삼축제]볼거리

영주 땅은 둘러볼 곳이 널려있다. '풍기인삼축제'만 즐기고 가기엔 너무 아쉬운 고장이다. 천년사찰 부석사에서 시작해 소백산, 희방폭포, 죽계구곡의 비경은 물론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에 이르기까지 하루만엔 도저히 다 볼 수 없는 관광명소가 즐비하다.

△부석사

풍기에서 부석사까지는 20분 남짓. '풍기인삼축제'가 열리는 10월 1~5일은 부석사의 감동을 가장 잘 체험할 수 있는 시기다. 다른 건 다 놓쳐도 부석사는 놓치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즈음이면 풍기에서 부석사까지 931번도로 20km부터 환상적인 은행나무 가로수길이 끝없이 펼쳐진다. 빨갛게 익은 사과들이 은행나무와 어울려 있는 모습에 부석사 가기 전부터 가슴이 뛴다. 부석사 입구 주차장에 내려 매표소를 지나 일주문으로 접어들면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은행나무길을 마주한다. 200m의 황금빛 세상이 끝나는 천왕문에 다다라 잠시 뒤를 돌아보면 황홀감에 다리가 떨려 온다.

천왕문에서부터 요사체·범종류·안양루·무량수전에 이르는 건물들은 가파른 돌계단으로 이어져 있다. 부석사 내 모든 건물들이 마치 뜬 돌(浮石:부석)처럼 느껴지는 까닭은 이 돌계단 때문이다. 돌계단이 끝나는 곳에 위치한 무량수전은 중간 부분이 불룩한 배흘림 기둥으로 잘 알려진 건물.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목조건물'이란 찬사가 이 배흘림 기둥에서 나왔다.

배흘림 기둥의 아름다움을 만끽했다면 누군가의 글처럼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등을 기대 보자. '아…', 누구라도 탄성이 터져 나올 수밖에…. 단풍에 물든 소백산맥의 봉우리와 줄기들이 한 눈에 쏟아지며 잊지 못할 풍경을 선사한다. 저녁나절까지 이곳에서 기다렸다 산자락 너머로 붉게 드리운 낙조까지 볼 수 있다면 더 이상 여한이 없으리라.

신라 문무왕 16년(서기 676년)에 의상대사가 창건한 화엄종찰 부석사는 국보 5점, 보물 4점, 경북도유형문화재 2점 등의 유물을 가진 곳으로도 이름 높다.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목조건물 '무량수전(국보 제18호) 외에도 다른 사찰과 달리 흙으로 만든 소조여래좌상(국보 제45호),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석등(국보 제17호), 고려시대 건축의 걸작인 조사당(국보 제19호), 조사당 벽에서 떼어낸 벽화(국보 제46호)가 국보로 지정돼 있다.

△소백산 국립공원

태백산에서 서남으로 갈린 산맥이 구름위에 솟아 경상도·강원도·충청도 3도의 경계를 짓고 서남쪽으로 구불구불 100여리를 내려 뻗어 일으킨 소백산은 영주·예천·단양·영월 네 고을을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다. 기품있는 선비의 풍모처럼 맑고 수려한 기상의 영기어린 성산이며, 지맥의 흐름으로는 한반도의 척추 부분에 해당하는 중요한 곳이기도 하다. 주봉인 비로봉(1천439m)에는 천연기념물인 주목(朱木)이 군락을 이루고 있으며, 나라가 어지러울 때 이 고장 선비들이 한양의 궁궐을 향해 임금과 나라의 태평을 기원하였다는 국망봉(1천421m)과 소백산 천문대가 있는 연화봉(1천394m), 그 옛날 산성의 흔적이 남아 있는 도솔봉(1천315m) 등 많은 산봉우리들이 이어지고, 소백산 중턱에는 신라시대 고찰 희방사와 비로사가 있고, 희방사 입구에는 영남 제일의 희방폭포(28m)가 1년 내내 시원한 물줄기로 국내외 관광객들을 즐겁게 맞고 있다.

△죽계구곡

소백산 깊은 계곡에서 발원한 죽계수는 기암괴석을 휘감아 죽계구곡에 떨어진다. 솟구치는 물방울이 마치 수정 구슬을 흩어 놓은 듯 아홉구비 절경을 빚어낸 죽계구곡은 안축 선생이 읊은 죽계별곡의 배경. 조선 중기에는 주세붕, 퇴계 이황 선생이 경치를 즐기며 시를 읊었던 곳. 2km에 걸쳐 9곡 이화동부터 1곡 금당반석까지 자리 잡고 있는데 1,2,4,5,9곡의 이름만 전해지고 있다.

제1곡 금당반석엔 아담한 폭포와 소(沼) 앞으로 너른 바위가 펼쳐져 있다. 2,3곡을 지나 4곡에 이르면 소 한가운데 둥근바위가 놓여 있다. 소에 떨어지는 물길은 용이 하늘에서 여의주를 물고 내려오는 모습을 닮았다 해 용추비폭이라 불린다.

△죽령옛길

해발 696m의 죽령은 소백산 제2연화봉과 도솔봉이 이어지는 잘록한 지점에 자리해 있다. 삼국사기에는 "아달라왕(阿達羅王) 5년(서기158년) 3월에 비로소 죽령길이 열리다" 라고 했고, 동국여지승람에는 "아달라왕 5년에 죽죽(竹竹)이 죽령길을 개척하고 지쳐서 순사(殉死)했고, 고개마루에는 죽죽을 제사하는 사당(竹竹祠)이 있다"는 기록이 있다.

유구한 역사와 온갖 애환이 굽이굽이 서려있는 죽령은 삼국시대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 군사의 불꽃튀는 격전장이기도 했다. 죽령을 처음 차지한 나라는 고구려였지만 신라 진흥왕이 백제와 연합해 고구려를 공략, 죽령 이북 열고을을 탈취했고, 그후 고구려 영양왕때 명장 온달 장군이 왕에게 자청해 군사를 이끌고 나가면서 "죽령 이북의 잃은 땅을 회복하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겠다"고 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남아 있다.

조선시대 이후 1910년대까지의 죽령은 경상도 동북지방 여러 고을이 서울 왕래 때 오가던 길이었다. 청운의 뜻을 품고 과거 길을 떠났던 선비, 공무를 띈 관원, 온갖 물산을 유통하는 장사꾼들로 사시사철 번잡했던 이 고갯길에는 길손들의 숙식을 위한 객점, 마방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이처럼 죽령 옛길은 장장 2천년의 오랜 세월에 걸쳐 우리나라 동남 지역 교통 대동맥의 한 토막으로 존재했지만 해방 이후 교통 수단의 발달로 사람이 끊겨 수십년 동안 숲과 덩굴에 묻혀 있었고, 이에 영주시는 죽령의 옛 자취를 되살려 보존하려는 뜻에서 1999년 희방사역에서 죽령주막까지 1시간 정도(2.5km) 걸리는 길을 복원했다. 울창한 숲의 나무와 산새, 다람쥐 등이 반기는 산길을 걸으며 선인들의 발자취를 느껴보면 어떨까.

△소수서원

조선 중종38년(1543년)에 풍기군수 주세붕이 세웠다. 서원의 효시이자 최초의 사액서원으로 유명한 이곳은 수많은 명현거유를 배출했고 학문탐구의 소중한 자료들을 소장하고 있다. 건립 당시엔 '백운동서원'으로 불렸는데 그후 퇴계 이황이 풍기군수로 부임한 후 조정에 건의해 소수서원으로 사액(賜額) 됐다. 사액서원이라 함은 나라로부터 책·토지·노비를 하사받아 면세 및 면역의 특권을 가진 서원을 말한다. 강학당, 일신재·직방재, 문성공묘, 회헌영정(국보 제111호), 대성지성문선왕전좌도(보물 제458호)등 중요 유물이 남아 있고, 숙수사지당간지주(宿水寺址幢竿支柱)(보물 제59호) 같은 불적(佛蹟)은 이곳이 통일신라시대의 사찰이었음을 말해준다.

이상준기자 all4you@msnet.co.kr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