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커피의 비밀]유럽으로의 전파

12세기 초 사라센제국이 분열되고 있을 무렵, 유럽인들은 이슬람교 지역의 성지 팔레스티나와 예루살렘을 되찾고자 여덟 차례에 걸쳐 '십자군운동'이라는 대원정을 감행한다. 이때 십자군에 참여한 유럽의 여러 나라 사람들이 이슬람 지역의 커피라는 음료를 처음 경험하게 됐다.

십자군운동이 끝난 뒤 유럽에는 새로운 사상의 물결이 일기 시작했다. 개인주의와 자유주의 사상의 영향으로 근대정신에 눈을 뜬 유럽인들은 종교적 교리에 묶여'이교도의 음료'로 낙인 찍혀 있던 커피에 대해 관대해지고, 커피를 마시며 금단의 열매를 따먹은 이브와 같은 기분마저 느끼게 됐다. 1573년 의사이자 식물학자인 독일인 레오할트 라우윌프는 동양으로 가는 길에 바그다드에 머물면서 커피와 관련된 내용의 견문록을 남겼다.

"이슬람교 국가에는 '카베'라는 맛있는 음료가 있는데, 잉크처럼 검다. 이것은 병이 났을 때 먹으면 효력이 있다. 특히 위병에 잘 듣는다." 이렇게 아랍권을 여행한 학자들을 통해서 유럽으로 커피가 점차적으로 알려지고, 호기심이 강한 일부 사람들이 커피를 유럽으로 사들이면서 커피를 마시는 습관이 유행처럼 번져 나갔다.

하지만 새로운 사상의 물결과 함께 커피가 유행하는 세태에 강한 거부감을 가졌던 중세 기득권층은 종교적인 교리를 내세워 교황 클레멘트8세에게 "이교도의 음료인 커피를 금지시켜 줄 것"을 탄원했다.

그런데 교황은 판결에 앞서 커피를 마셔보고는 오묘한 향과 맛에 감탄하며 커피에 세례를 내렸다. 이를 계기로 일반 기독교인까지도 공공연히 커피를 마실 수 있게 되고, 곳곳에 커피하우스가 생겨나면서 커피 소비량이 급증, 공급부족에 따른 품귀현상이 나타났다.

이때까지만 해도 아랍권은 커피 묘목과 종자 유출을 엄격히 금지해 아랍에서만 커피가 재배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유럽은 커피를 재배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유럽으로의 커피공급은 아라비아 상인과 베네치아 상인 간의 뒷거래로 이뤄졌다. 17세기 오스만제국은 외교·문화적으로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프랑스 파리 대사로 술래이만 아가를 파견했다.

술래이만은 거대한 저택을 임대, 멋지게 꾸몄다. 그리고는 파리의 귀족들을 초대, 이슬람의 이국적 문화를 소개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인기를 끈 문화는 바로 커피와 관련된 것이었다. 그후 많은 귀부인들이 커피를 마셔보기 위해 술래이만의 저택으로 몰려 들었다. 영국 역사가 아이삭 디스렐리는 술래이만의 커피 파티를 이렇게 묘사했다.

"훌륭한 의상을 갖춰입은 대사의 흑인 노예들은 금으로 가장자리를 수놓은 비단 받침을 깐 금은쟁반 위에 계란껍질처럼 얇은 자기 잔을 놓고, 여기에 뜨겁고 진하고 향기로운 최고급 모카커피를 담아 무릎을 꿇고서 올렸다. 호기심으로 자극된 귀부인들은 새롭고 뜨거운 음료 위로 립스틱으로 칠하고 분으로 두드린 얼굴을 기울이다가 찡그리고는 부채질을 해댔다." 진하고 걸쭉한 터키식커피에 얼굴을 찡그린 귀부인들에게는 특별히 설탕이 제공됐다.

프랑스는 사교와 미식으로 유명한 나라답게 만남의 자리에서, 그리고 식사의 맨 마지막 순서로 커피를 즐겨 마셨다.

김영중(영남대사회교육원 커피바리스타과정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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