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여우난 곬족

추석 지난 지도 며칠 됐다. 멀리 있는 일가친척들이 모여 시끌벅적대다 썰물처럼 빠져 나갔다. 오늘쯤은 다들 제자리로 돌아가 평정심을 되찾았을 게다. 연로하신 부모님은 오늘도 허적한 집안을 이리저리 기웃거리다가 장롱 모서리에 숨은 손자의 때 묻은 양말 한 짝을 발견하고는, 장난끼 많은 손자가 눈에 밟히는지 슬며시 양말을 뺨에다 부빈다.

백석의 시 '여우난 곬족'을 생각한다. 명절날, 여우가 나오는 골짜기의 진외갓집에 일가친척이 한데 모여 소박하고 풍요로운 공동체적 삶을 누리는 모습을 노래한, 참으로 솔직하고 흥겨운 시이다.

명절날 나는 엄매 아배 따라 우리집 개는 나를 따라 진할머니 진할아버지 있는 큰집으로 가면 … … 밤이 깊어가는 집안엔 엄매는 엄매끼리 아릇간에서들 웃고 이야기하고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웃간 한방을 잡고 조아질하고 쌈방이굴리고 바리께돌림하고 호박떼기하고 제비손이구손이하고 이렇게 화디의 사기방등에 심지를 몇 번씩 돋구고 홍게닭이 몇 번이나 울어서 졸음이 오면 아릇목싸움 자리싸움하며 희드득꺼리다 잠이 들고….(후략)

지난 1950, 60년대까지만 해도 명절날 큰집은 아이들 세상이었다. 먹을 것과 놀이기구가 태부족이던 옛날이었지만 마음만은 풍요롭던 명절이었다. 그 시절은 그랬다. 밤늦도록 온갖 놀이를 벌이며 떠들어도 어른들 눈치 보지 않아 좋았고, 숨쉬기조차 힘들 정도로 뒤엉겨 자면서도 사뭇 즐겁고 행복했더랬다. 사촌이다 육촌이다 하며 한 방에서 부대끼며, 울고불고, 다치고, 편들고, 왕따당하면서도 함께 밤을 지새우며 끈끈한 정을 쌓았더랬다. 무국도 된장국도 좋았다. 주는 대로 뚝딱 해 치우던 먹성들이었다.

요즈음은 아이들이 집집마다 한둘이라 다 모여 봤자 몇 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아프다는 둥, 집 본다는 둥, 공부한다는 둥,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오지 않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온 아이들도 서로 눈치나 보며 외톨이로 빙빙 돌기 일쑤다. 그저 좋은 옷, 좋은 신발, 좋은 선물타령하며 양보도 희생도 인내심도 없다. 오직 자신의 안전과 편리만 고집하는 지금의 아이들에게서 공동체 의식이란 찾아 볼 수 없다. 컴퓨터와 온갖 전자기기를 친구 삼아 노는 지금의 현실 속에서 자기만 알고 남을 배려하지 않는, 메마른 인성을 가진 청소년들의 미래가 걱정스럽다.

고향에서 무사히 도착한 아빠는 아이들 보는 앞에서 할아버지 할머니와 친척들에게 다시 한번 안부전화라도 올리면 어떨까. 작은 행동 하나가 큰 행복을 가져오고 따스한 정이 쌓여 공동체 의식을 키우게 된다는 사실을 직접 보여주었으면 한다.

뿌리 튼튼한 나무가 열매도 많은 법이다.

공영구(시인·경신고 교사)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