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메뚜기 시계'

들녘에 서서히 가을물이 들고 있다. 얼마 후면 논배미 여기저기서 탁, 탁, 튀어오르는 메뚜기들을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메뚜기에 대한 사람들의 이미지는 대체로 '비호감'쪽인 듯하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종잡을 수 없음 때문일까. 아니면 보기와는 다른 무시무시한 식탐 때문일까. 하기야 펄 벅 원작의 영화 '대지'에서처럼 하늘을 뒤덮은 거대한 메뚜기 떼와 그것들이 지나간 뒤의 황폐한 대지는 공포 그 자체다. 요즘도 아프리카 등지에선 메뚜기 떼가 광활한 농작지를 결딴내버리는 사례가 적지 않다.

'시간을 갉아먹는 메뚜기'로 불리는 괴상한 이름의 시계가 선보여 지구촌의 화제가 되고 있다. 지난 19일 영국 케임브리지대 코퍼스 크리스티 칼리지에서 세계적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 박사에 의해 공개된 시계다. 그런데 시계라기엔 영 이상하다. 지름 1.2m의 순금 도금판 위에 거대한 메뚜기 한 마리가 올라앉았을 뿐이다. 시간을 가리키는 숫자도, 시침이나 분침'초침 그 어떤 것도 없다. 도금판에 새겨진 60개의 홈이 겨우 시계의 얼굴 흉내를 내고 있다.

메뚜기의 모습도 흉물스럽다. 기다란 바늘처럼 생긴 이빨, 가시 돋친 다리와 꼬리를 갖고 있고 날카로운 발톱으로 시간을 움켜쥔 채 눈을 끔뻑거리며 입을 벌린다. 게걸스럽게 시간을 갉아먹는 '시간 포식자'의 이미지다. 더구나 매시 정각이 되면 쇠사슬이 관 속으로 떨어지고 관 뚜껑이 닫히는 요란한 소리를 낸다 하니 숫제 공포스럽다.

이 희한한 시계는 케임브리지대 출신의 발명가 존 테일러 박사가 100만 파운드(약 20억 원)의 자비를 들여 제작, 모교에 기증했다 한다. 시계의 정확한 움직임을 조절하는 세칭 '메뚜기 脫進機(탈진기)'를 발명했고 세계 최초로 항해용 시계를 제작, 원거리 항해술 발전에 큰 획을 그은 존 해리슨(1693~1776)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것이라 한다. 또한 '시간을 잡아먹는 야수'로서의 메뚜기는'지나간 시간은 결코 되돌릴 수 없다'는 사실을 상징하기 위한 장치라는 것이다.

9월도 며칠 남지 않았다. 흔히들 시간의 체감 속도는 나이와 비례한다는데 달수와도 비례관계인 것 같다. 1월은 시속 10㎞, 2월은 20㎞, 9월은 90㎞…. '메뚜기 시계'의 등장이 순간순간 흘러가는 시간의 소중함을 새삼 일깨워준다.

전경옥 논설위원 sirius@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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