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제국은 20년간 시행하다 13년간 중단했던 金(금)본위제를 1930년에 부활시켰다. 바란 대로 금값이 오르기 시작했다. 이듬해 그 제도를 다시 폐지시켰지만 금값은 되레 폭등기에 들어섰다. 미국 서부에서나 있었던 듯 생각하기 십상인 노다지 광풍이 그 덕분에 조선에도 불어닥쳤다. 팔공산의 여러 금광들에 활기가 돈 것도 그때였다.
그 즈음 전국적으로 이미 유명해져 있던 신흥 갑부는 崔昌學(최창학'1890∼1959)이었다. 고향 평북 구성에서 금광을 발견해 급작스레 조선 3대 부자 중 하나로 올라선 사람이다. 그곳에 100칸 넘는 아방궁을 뒀던 그는 1938년 서울로도 근거지를 넓히면서 중구 평동 京橋(경교, 혹은 京口橋) 인근 죽첨町(정)이란 왜색 이름의 동네에 竹添莊(죽첨장)이란 저택을 완공했다. 대지 1천584평에 1층 117평, 2층 91평으로 지은 양옥이었다.
그러나 몇 년 후 광복돼 백범 김구 선생이 환국하자 최는 잽싸게 그 집을 내줬다. 일제 대신 이번엔 백범 쪽에 줄을 선 것이리라는 의심이 뒤따랐다. 택호가 京橋莊(경교장)으로 바뀐 죽첨장은 그 2층 방에서 새 주인이 암살될 때까지 3년7개월여간, 이승만의 梨花莊(이화장'서울 종로구 이화동, 대지 1천821평, 한옥 70평) 등과 함께 건국 활동의 요람이 됐다.
그 저택은 백범 서거 후 본래 주인 최창학에게 반환됐다. 그 후엔 타이완 등등의 대사관으로 쓰이기도 했다. 1967년에는 삼성 측에 매입돼 당시 고려병원에 속하게 됐으며, 현재까지 강북삼성병원의 일부가 돼 있다.
일제강점기 시대 불어닥친 금광 열풍부터, 그 시절 재벌의 친일 행각, 광복과 임시정부 환국, 요인들의 건국 활동, 반민특위, 백범 암살, 삼성의 성장 등 온갖 우리 근대사를 품어 안은 공간이 경교장인 셈이다.
그러나 경교장은 지금껏 그에 걸맞은 대우를 받지 못한다. 1996년엔 그 자리에 고층 새 병원을 지으려는 계획이 수립돼 철거 직전까지 가기도 했다. 시울시청이 아예 사들여 완전 복원하겠다는 계획은 올 들어서야 확정됐을 뿐이다. 하지만 어제는 그것마저 삼성 측의 거부로 무산됐다는 보도가 있었다.
만사에는 때가 있는 법임을 가르치는 일일까. 우리 지역에도 혹시 失期(실기)하는 역사적 과업이 없는지 재삼 살펴야겠다.
박종봉 논설위원 pax@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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