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월스트리트에서 수학과 컴퓨터 천재들이 모여 설립한 헤지펀드 LTCM(Long Term Capital Management)는 펀드매니저들에게 신화였다. 출범 첫해 다른 펀드매니저들이 마이너스 수익률에서 헤매고 있을 때 이들은 28%의 수익률을 올렸고 이후 2년 연속 40% 이상의 경이적인 수익률을 기록했다. 아시아 금융위기가 발생했던 1997년에도 이 펀드의 수익률은 17.1%나 됐다.
LTCM이 이처럼 눈부신 성과를 낸 방법은 간단하다. 수학적 모델을 이용해 시장 또는 금융상품 간 가격차를 계산해낸 다음 불균형이 있으면 비싼 것은 '사정없이' 팔고 싼 것은 사들이는 것이었다. 그들의 성공은 그들이 개발한 모델의 정확성을 입증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고, 그 '공로'로 모델의 공동개발자였던 마이런 숄즈 MIT 교수는 1997년 노벨 경제학상까지 받았다.
LTCM을 성공으로 이끈 생각은 이런 것이었다. '시장이 효율적이라면 채권이나 옵션 등 모든 금융상품은 결국 최적가격에 수렴할 것이다. 그것을 먼저 계산할 수 있다면 현재 가격과의 차이만큼 돈을 벌 수 있다.' 시장이 효율적(곧 합리적)이라는 것은 신자유주의의 신조다. 신자유주의는 시장은 과열을 스스로 식힌다는 믿음도 견지한다. 곧 시장은 '혼자서도 잘하는' 자기완결적인 실체라는 것이다. 이 같은 생각은 신자유주의의 시조인 F 하이에크에서 비롯된다. 시장은 '자연적 질서'이고 국가나 정부는 '인공적 질서'이다. 이 둘을 강제로 결합시키면 자생적 질서가 파괴된다. 국가가 경제를 살린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뭐 이런 것이 하이에크의 생각이었다.
시장이 합리적이라면 시장의 움직임도 예측가능할 것이다. 과연 그럴까. 결론은 '아니다'이다. 영원히 잘나갈 것 같았던 LTCM은 1998년 파산했다. 큰돈이 될 것으로 보고 매입해두었던 러시아 채권이 모라토리엄(채무상환유예) 선언으로 휴지조각이 됐다. 그들은 '아무도 살 사람이 없는' 사태, 시장의 붕괴를 예측하지 못한 것이다.
물리학자 출신으로 월스트리트에 진출한 금융공학자 이매뉴얼 더만은 시장의 예측불가능성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물리학에서는 하느님을 상대로 경합을 벌인다. 그분은 자신이 세운 법칙을 자주 바꾸지 않는다. 그래서 외통수로 밀어붙이면 그분은 패배를 시인한다. 그러나 금융에서는 하느님의 피조물을 상대로 경합을 벌이인다. 그들은 자산을 자신의 덧없는 의견을 기반으로 평가한다. 이들은 패배해도 패배한 줄 모르고 계속해서 시도한다."
서브프라임모기지 부실이 촉발한 미국 금융위기는 시장이 합리적이며 예측가능하다는 신자유주의 신조를 또다시 산산조각냈다. 1990년대 닷컴 버블이 붕괴된 뒤 돈이 주택시장으로 몰리면서 계속 오를 것으로 생각됐던 집값은 예측과는 정반대로 움직였기 때문이다. 파생금융상품을 통해 위험을 '위험 제로'에 도달할 수 있다는 월스트리트의 오만과 탐욕은 시장붕괴의 촉매제였다.
이번 사태로 시장에 대한 규제강화와 국가의 역할 증대가 새로운 대세가 되고 있다. 이른바 '국가의 귀환'(파이낸셜타임즈)이다. 로버트 쉴러 예일대 교수는 이를 당연한 것이라고 말한다. "자본주의 경제는 규제가 없으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다. 착한 행동을 강요할 누군가가 필요하다. 모두가 선의를 갖고 있는 게 아니며 모두가 관대하고 공익정신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상황 앞에서 우리의 머리는 복잡해진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시장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배워온 우리에게 미국의 시장실패는 엄청난 혼란을 던져주고 있다. 우선 미국식 투자은행을 모델로 하는 국내 자본시장통합부터 추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부터 판단이 서지 않는다. 그러나 시장의 실패가 확인된 이상 시장만능주의는 안 된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그러면 정부의 개입과 규제 강화라는 구체제로 돌아가야 하는가. 이 또한 답하기가 至難(지난)한 문제다. 정부 역시 실패할 수 있다는 것을 외환위기를 통해 절절히 경험했지 않은가. 산업은행의 리먼브러더스 인수 시도에서 드러났듯 이번에도 '정부의 실패'는 되풀이될 뻔했다. 그 같은 저급한 판단력을 드러낸 이명박 정부에게 우리가 찾는 답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우리의 고민을 해결해 줄 지혜는 어디에 있는지 가슴이 답답해온다.
정경훈 정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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