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변화라는 모험

"그림이 바뀌었군요. 왜죠?" 이런 질문에 담긴 함의는 자못 복잡하다. 한 가지 주제를 붙들고 깊이 파고드는 화가의 일생에 대한 긍정적 기억도 있을 터이고,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화풍으로 계속 그리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으냐는 언사이기도 하다. 그러면서 관객을 설득할 만한 변화에 대한 타당한 이유가 있다면 밝혀 보라는 주문이다.

화가의 작품 전시회에 관객이 변모했다고 느낄 정도의 화면을 내놓고 설명을 우물쭈물하는 건 변화의 필요성에 대한 확신도 없이 이리저리 찔러 본 짓거리로 평가절하된다. 나의 경우에도 머릿속을 떠도는 상념들을 조합해보니 영 신통찮다. 난 왜 이렇게 재미난 설명도 순발력도 없나 하는 순간 땀이 확 번진다. 그래도 살아있다는 게 변화인데 무슨 이유가 있어야 하나 싶은 마음은 답답한 설명을 만들어낸다.

삼라만상의 본질은 변화일 것이다. 이런 천변만화하는 모습에서 삶의 지혜를 얻었고 지혜를 찾는 이유도 삶을 변화시키기 위해서이다. 그렇다 보니 변화에 대한 강박증이 생기는 한편 변해선 안 되는 것들을 열거하지만 오래 간직하려는 바람이지 불변은 없다. 불멸 또한 사라지지 않을 뿐 변화를 피하진 못한다. 과거에서 현재로 올수록 변화에 대한 속도는 긴박하다. 자연 속에서 아름다움을 찾았던 고전 미술은 변화의 속도가 느렸고 새로움이 아름다움이 되어버린 현대 미술은 변화에 기민하다.

그러나 속도감이 다를 뿐 변화는 역사나 개인에게 필연이다. 어리석음과 죽음만이 변화하지 않는다고 말하듯이 현대의 화가들도 끊임없이 새로운 형식과 내용을 찾는 모험으로 뛰어들지 못하면 미술사 바깥으로 내몰린다. 모험에 나서도 목적지에 다다르기는 어렵고 생환은 더욱 힘겹다 해도.

현실이라는 고됨의 운명은 안주를 꿈꾸게 하지만 세상의 쉬운 길은 지옥으로 뚫려 있다는 사실과도 직면해야 한다. 변화하지 않는 그림이란 '이런 그림 좋아할 거야' 하며 대중의 취향을 겨냥하는 것이다. 반면에 변화를 추구하는 그림이란 공간과 삶을 향상시키고자 인간에 대한 깊은 애정으로 '방황한' 화가의 기록물이다.

변화는 새로움과 만나는 기회이고 인생이란 여정을 다채롭게 만든다. 인간이 자기이해과정의 가장 탁월한 객관적 증거로서 위대한 예술 작품을 향한 추구가 계속될 때 인생은 예찬할 만한 진행형이다.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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