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그곳에는 인생이…'동춘 서커스' 단원 일일 체험

우연이었지만 아이러니였다. 대구를 찾은 '동춘(東春) 서커스' 취재차 자료를 찾던 중 캐나다의 '태양의 서커스(Cirque du Soleil)' 내한 공연 광고를 우연히 보게 됐다. 두 극단 모두 각국을 대표한다는 타이틀을 내세우지만 지명도나 흥행의 엄청난 차이는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 '태양의 서커스'는 흔한 말로 'A급'이다. 화려한 무대와 번쩍이는 조명, 단원들의 날쌘 몸짓이 시선을 확 끈다.

그러나 동춘서커스의 현실은 어떤가? 한국에서 서커스는 '사라지는 것'에 대한 아쉬움과 추억부터 먼저 떠올리게 한다. 혹자는 화려한 '태양의 서커스'와 대비되는 동춘서커스의 현실에서 영화 '길'(La Strada) 마지막 장면에서 울부짖던 주인공 잠파노의 슬픔을 읽어낸다. '실낱같이 남은 애환'을 짚어낸다. 차력 쇼를 보여주며 약을 팔던 시골악단의 처량함을 떠올리기도 한다.

80년 넘게 한국 서커스의 명맥을 잇고 있는 동춘서커스가 대구를 찾았다. 지난 13일부터 10월 7일까지 25일간 중동교 밑 신천변 잔디마당에서 '중추절과 대구컬러풀축제 참가 특별 합동공연'을 열고 있다. 그런데 첫 주말부터 인기가 대단했던 모양이다. 밀려드는 관객에 추가 공연까지 벌였다는 소문이다. 특별히 광고를 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신천변에 산책이나 운동 나온 사람들이 공연장 입구에 붙여 놓은 펼침막 안내문만 보고 공연장을 찾을 뿐이다. 한 번 가면 언제 다시 올지 기약할 수 없는 그들이 아닌가! 지난 22일 오후 동춘서커스단 공연 현장을 찾았다. 단원들이 무대 뒤에서 펼치는 다양한 삶의 현장을 스케치하는 기회였다. 기자는 잠시나마 미약한 힘도 보탰다.

◆흥행 안 되고 돈 꼬라박고…

오후 6시 30분쯤 동춘서커스 천막 공연장에 도착했다. 오후 5시에 시작한 2회 공연이 막바지 단계였다. 상하이 오토바이 모험단의 공연이 진행 중이었다. 플라스틱 간이 의자에 관객 40여명이 '목숨을 건 묘기'를 숨죽이고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와 함께 온 주부도, 나이가 지긋한 할머니들도 보였다. 중국 허베이성(湖北省) 서커스단의 집단체조를 끝으로 공연은 끝이 났다.

박세환(64) 단장을 찾았다. 지난 16일 박 단장을 만나 취재협조를 요청해 놓은 상태. 그러나 박 단장은 자리에 없었다. 직원 한 사람이 "밀린 업무를 보느라 서울에 갔다"고 알려줬다. 처음부터 일이 꼬이는 걸까? 박 단장에게 전화를 하니 단원들에게 취재가 있을 거라는 말도 해 놓지 않았단다. 때마침 식사 시간이라며 한 단원은 기자를 쫓아내기에 바빴다. 관객들은 공연 30분 전부터 찾아온다니 그때까지 별수가 없었다. 표를 파는 일부터 시작해보려던 기자의 계획은 실패한 상태였다. 일진이 나빴는지 잔뜩 화난 표정의 매표소 직원이 '출입불가' 뜻을 굽히지 않는다.

그렇다고 마냥 기다릴 수만도 없는 노릇. 계획을 바꿔 일단 공연장 곳곳을 살피기로 했다. 방수 및 방음 처리된 동춘서커스단의 천막 공연장은 폭 25mx20m에 기본 9m, 최고 높이가 17m에 달한다. 그 안에 무대를 설치하고 500여개의 플라스틱 의자를 놓아 객석을 만들었다. 무대 앞에는 돗자리를 깔아 앉아서 볼 수도 있게 했다. 매점 일을 보는 단원에게 말을 걸었다. 입단한 지 15년 됐다는 이 남자는 시설 관리 일을 한다고 했다. 들어 보니 서커스라는 것이 돈을 벌 땐 벌어도 '깨질' 땐 왕창 깨지는 장사란다. "1년에 딱 2차례 정도 성공할 뿐 나머지 공연에서 돈을 꼬라박는 것"이라는 거다.

◆무대 뒤를 들여다보다

이런 상황이니 한국인 단원은 찾기 어렵다. "약 60명 단원 가운데 한국인은 10명뿐"이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나마 이날 공연한 단원 가운데 한국인은 3명뿐이었다. 얘기를 끝내고 무대 뒤를 돌아봤다. 밖에서는 안 보였는데 컨테이너 주택 8채가 숨어 있었다. 10㎡가 안 돼 보이는 작은 공간은 장비 보관소이면서 당직실이자 분장실이다. 평소에는 숙식을 해결하는 생활공간이기도 한데, 이번 대구공연에선 하천 보호 때문에 주변에 숙소를 구해 지내고 있다. 식사 담당하는 단원도 3명이 있단다.

컨테이너 방은 좁았지만 에어컨이며 가구, TV, 컴퓨터 등 있을 건 다 있었다. 10대로 보이는 중국인 소년들은 인터넷에 몰두해 있었다. 힘든 서커스단 생활의 낙인 것 같았다. 따로 공연 연습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연습은 공연이 없을 때 많이 하고 공연 중에는 오전 10~오후 1시 사이에 간단히 한다고 했다. 단원들이 피곤해지면 안 되기 때문.

무대 뒤를 더 돌아보려는데 개들이 마구 짖어댔다. 동물쇼에 출연하는 개들인데 낯선 이의 출현에 잔뜩 긴장해 있었다. 자신의 공연을 기다리며 분장을 확인하는 김영희(43·여)씨를 만났다. 공중곡예와 동물서커스를 담당하고 있는 그녀를 동춘서커스 홈페이지(www.circus.co.kr)는 '동춘써커스의 마지막 보루'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녀는 최고령 공연자다. 다섯살 때 고향인 경남 김해에서 서커스를 보고 묘기가 너무 신기해서 시작한 서커스 인생을 30여년째 이어 오고 있다. 동물서커스로 TV에도 여러 번 출연한 그녀다. 그동안 여성 곡예사 서너 명이 거쳐 갔지만 이제 혼자만 남았다. 그녀는 "어떻게든 서커스 명맥은 이어지겠지만 토종 서커스가 사라질 위기라서 안타깝다"고 했다.

◆박수·환호에 흥이 절로

오후 8시가 조금 지나자 공연 진행을 담당하는 양종근(27)씨의 소개와 함께 공연이 시작됐다. 그는 13세 때 서커스단에 들어와 14년째 일하고 있다. 원래 묘기도 하는데 다리가 안 좋아 진행을 맡았다. 그의 옆에서 공연을 지켜 보았다. 각종 장비와 소품으로 가득한 무대는 비좁았다. 그 틈에서 몸풀기를 하는 단원, 공연 전후로 뛰어다니는 단원들로 분주했다. 그 중에 아홉살 쌍둥이 고아름·고은 자매도 있었다. 김영희씨는 "동춘서커스 최연소 곡예사다. 중국에서 학교에 다니다가 입단했다. 한국 곡예계를 이끌 인재"라고 두 자매를 소개했다.

공연장엔 관객이 제법 들어와 있었다. 족히 200명은 넘어 보였다. 관객이 많다 보니 오후 5시 공연에 비해 공연도 더 활기차게 진행됐다. 김영희씨의 목숨을 건 공중그네 묘기에는 객석의 숨소리마저 멎어 버렸다. 아슬아슬, 행여라도 떨어지지 않을까 숨죽인 관객들은 공연이 끝나자 더욱 크게 박수소리를 토해냈다. 쌍둥이 자매가 공연을 할 땐 한 중년 신사가 무대 앞으로 뛰어나와 자매의 손에 1만원권 지폐를 쥐여 주었다.

한껏 고조된 공연 분위기는 상하이오토바이 모험단의 오토바이묘기쇼에서 절정에 달했다. 이 또한 목숨을 걸고 펼치는 쇼였다. 지름이 6~7m쯤 돼 보이는 철제구(球) 안에서 4대의 오토바이가 부딪칠듯 말듯 지나치는 모습이 가슴 졸이게 했다. 오토바이 1대, 2대, 3대, 4대가 차례로 들어가면서 묘기의 난이도도 점점 높아졌다. 숨을 죽이던 관객들은 오토바이쇼가 끝나고 단원이 인사를 하자 우레 같은 박수를 보냈다. 중국인 단원들의 집단체조를 마지막으로 공연은 오후 9시 50분쯤 끝났다.

◆관객들의 열띤 호응 뒤의 아쉬움

공연장 근처인 봉덕동에 산다는 이호이(54)씨는 "17, 18세 때 동춘서커스 공연을 본 적이 있는데 오랜만에 보니 매우 좋았다. 앞으로도 가끔 한 번씩 보고 싶다"고 했다. 가족과 함께 공연장을 찾은 한 30대 주부는 "너무 감동적이라 두 번이나 울 뻔했다"고 했다. 한 할머니는 "어릴 때 봤을 때 재미 있었는데 지금도 재미있다"고 대답했다.

오후 9시 55분, 객석 사이 쓰레기를 줍고 간단하게 정리가 되자 공연장 외부의 조명이 꺼졌다. 어둠 속에 우뚝 솟은 천막은 바로 옆 루미아르떼(빛을 이용한 예술 장치) 불빛을 받아 함께 빛나기 시작했다. 오후 10시가 되자 루미아르떼 불빛도 휴식에 들어갔다. 희미한 가로등 불빛만이 덩치 큰 동춘서커스 천막을 비출 뿐이었다.

동춘서커스는 한국의 여타 전통 문화와 비슷한 길을 걷고 있다. 사람들의 관심은 멀어지고 전승자 찾기는 갈수록 더 힘들어진다. 그 빈 자리를 중국 기예단이 메우고 있다. 박세환 단장은 항상 "우리나라는 국토가 좁은데다 사계절 변화 때문에 서커스 공연하기가 쉽지 않다. 엑스트라 양성에만 기본적으로 4년이 든다"며 어려움을 토로했다. 그는 "정부나 지자체 지원이나 대기업 스폰서가 필요하다. 그러지 않으면 동춘서커스도 1, 2년 뒤에는 없어질지도 모른다"고 했다.

어려움 속에서도 동춘서커스는 매달 80회, 해마다 전국 15곳을 돌며 1천회 이상 공연을 쉬지 않고 이어가고 있다. 조금이라도 쉬면 단원들이 뿔뿔이 흩어지기 때문이란다. 박 단장은 '태양의 서커스'를 모범사례로 꼽았다. "캐나다 정부가 150억원을 투자한 '태양의 서커스'는 현재 연 5천억원 이상의 수익을 올리는 문화사업이 됐다"는 설명. 그러나 동춘서커스의 운명은 심야의 어둠 속에 묻혀버린 천막 공연장만큼이나 불투명해 보였다.

조문호기자 news119@msnet.co.kr 사진·정운철기자 woon@msnet.co.kr

▨동춘서커스단은?

일본 서커스단에서 고(故) 동춘(東春) 박동수가 1925년 조선인 30여명을 모아 창단했다. 1927년 목포시 호남동에서 첫선을 보였다. 1960~1970년대 최대 호황을 누렸으며, 한때 단원이 300명 가까이 이르기도 했다. 영화배우 허장강, 코미디언 서영춘을 비롯해 배삼룡, 백금녀, 남철, 남성남, 장항선 외에 가수 정훈희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스타를 배출했다. 지금은 창단자의 양아들 박세환씨가 이끌고 있다. 2년을 주기로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며 공연을 하고 있다. 053)471-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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