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복거일의 시사코멘트] 잊혀진 영웅

학생들에게 한국 현대사를 올바로 가르치려는 움직임이 차츰 동력을 얻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걱정해온 것처럼, 주로 좌파 지식인들이 만든 중등교육 역사 교과서들은 걱정스러울 만큼 한국에 적대적이었고 북한에 호의적이었다. 한국 현대사에서 특히 편향과 왜곡이 심했던 부분은 당연히 한국 전쟁이었다.

다행히, 좌파 정권이 물러나면서, '잊혀진 전쟁'을 새롭게 인식하고 나라를 구한 분들을 기리려는 움직임이 일었다. 9월 15일에는 해군이 인천상륙작전을 재연하는 작전을 폈다. 이어 해군은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해서 서울 수복 작전에서 전사한 윌리엄 해밀턴 쇼 미 해군 대위를 기리는 추모 공원을 만들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1922년에 평양에서 태어난 그는 한국 해군의 창건에 공헌했고, 전쟁이 나자, 자신이 가르쳤던 한국 해군 장교들을 도우려 현역으로 복귀해서 참전했다.

한국 전쟁을 일으킨 북한 지도부는 미리 승리를 확신했다. 미국의 개입 가능성을 걱정한 스탈린과 마오쩌뚱에게 김일성은 '미군이 개입하기 전에 끝내겠다'고 호언했다. 그렇게 한국이 꼼짝없이 지도록 된 전쟁을 끝내 역전시킨 과정엔 당연히 수많은 영웅들의 공헌이 있었다. 한국전쟁사를 읽으면, 전투마다 우리가 기려야 할 영웅들이 나온다. 내가 꼭 기리고 싶은 영웅들 가운데 오늘 생각나는 이들은 제임스 린치(James H. Lynch) 미 육군 중령과 로버트 베이커(Robert W. Baker) 중위다.

1950년 9월 23일 04시 30분 '린치 임무단(Task Force Lynch)'은 상주 낙동리 나루에서 낙동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미 제1기병사단 제7기병연대의 3대대장 린치 중령이 이끈 이 임무단은 3대대를 중심으로 1개 전투공병 중대, 2개 전차 소대(전차 7대), 1개 야전포병 대대, 1개 중박격포 소대, 1개 수색정찰 소대로 이루어진 혼성 부대였다.

북쪽에선 9월 15일에 시작된 인천상륙작전이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크로마이트 작전(Operation Chromite)'이라 불린 이 멋진 상륙 작전은 상륙 부대인 미 10군단이 북한군의 퇴로를 끊고 낙동강 전선을 지키던 미 8군이 공격에 나서서 북한군을 파괴한다는 내용이었다. 한강 남안에서 기다리는 10군단의 '모루'에 힘차게 떨어질 '망치'의 머리가 바로 '린치 임무단'이었다.

낙동리 나루를 건넌 이 부대는 10군단 예하 제7사단이 기다리는 오산으로 향했다. 진격 속도가 하도 빨라서, 이 부대는 천안에서 북한군을 따라잡았다. 베이커 중위가 이끈 제70전차대대 C중대 3소대의 전차 3대는 진격 속도를 늦추지 않고 아직 적군 전차 부대들이 있는 지역을 지나 기적적으로 오산의 제7사단 31연대 지역에 닿았다. 꼭 58년 전인 1950년 9월 26일 22시 26분이었다.

크로마이트 작전의 성공은 한국 전쟁의 구도를 단숨에 바꿔놓았다. 9월 28일에는 서울이 수복되었고, 모든 전선에서 북한군은 패주하기 시작했다. 당시 낙동강 전선에 있던 북한군 7만 명 가운데 38선을 넘어간 병력은 겨우 2만 5천 명이었던 것으로 추산된다.

이제 낙동리 나루는 기능을 잃었고 그 나루에서 차가운 새벽 강물을 건너 북진의 길에 오른 '린치 임무단'도 잊혀졌다. 그래도 나는 그려본다, 언젠가 그 나루에 비석이 서고 거기 '린치 임무단'의 공적이 새겨지는 모습을. 그 어려운 전쟁에 싸워 이 나라를 지킨 영웅들을 잊을 도덕적 권리가 우리에겐 없다.

복거일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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