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만추를 노래하는 속리산

도는 사람을 멀리하지 않는데(道不遠人)

사람이 도를 멀리하고(人遠道)

산은 속세를 떠나지 않는데(山非離俗)

속세가 산을 떠난다(俗離山)

신라 헌강왕 때 속리산 묘덕암을 찾은 고운 최치원 선생이 남긴 시(詩)다. 선생이 읊은 그대로 속리산의 속리(俗離)는 속세를 떠난다는 의미. 충북 보은과 괴산, 경북 상주 화북면에 걸쳐 있는 그 옛날 속리산은 말 그대로 첩첩산중이었다. 구절양장보다 더 힘들다는 열두구비 말티고개를 넘어야만 속리에 이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천년 세월이 흐른 지금, 더 이상 속리는 속리가 아니다. 사방팔방 시원하게 길이 뚫려 속리산 가는 길이 더할 나위 없이 편해졌다. 오전 8시 30분에 북대구IC를 나서 속리산 매표소에 다다른 시간은 10시.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김천분기점에서 중부내륙고속도로로 갈아탄 뒤 지난해 12월 개통한 상주~청원고속도로에 진입하면 '눈 깜짝할새' 속리산IC다.

속리산 오리숲

열두구비 말티재를 지나 가장 먼저 들어오는 속리산 풍경은 고갯길 들머리에 위치한 '정이품송'(천연기념물 103호)이다. 1464년 세조가 속리산에 들렀을 때 가마가 나뭇가지에 걸리지 않도록 번쩍 들려 벼슬이 내려졌다는 바로 그 소나무. 하지만 벼락과 폭설에 가지가 찢기고 상처를 얻어 예전의 자태는 찾기 힘들다. 철근 구조물에 겨우 의지하고 있는 정이품송의 모습은 안쓰럽기만 했다.

안타까움을 잠시 뒤로하면 속리산 '오리(五里)숲'길이 펼쳐진다. 오리숲은 속리산 매표소에서 법주사 입구까지 이어진 숲의 길이가 5리(2km)에 이른다고 해 붙여진 이름. 수령 100~200년이 넘는 소나무·떡갈나무·참나무가 하늘을 가려 아름드리 터널을 이룬다.

마침 아침나절 비가 와서였을까. 안개를 뚫고 쏟아지는 햇살이 운치를 더하고 빗방울을 머금은 잎사귀가 마음마저 싱그럽게 한다. 속리산 오리숲은 언제라도 좋은 곳이지만 10월 말~11월 초가 가장 좋다. 만추에 맞는 단풍의 노래는 놓치면 후회할 절경.

매표소를 지나면 오리숲과 한데 어우리진 법주사 일주문을 만난다. 불법(佛法)을 향한 일심귀의(一心歸依)를 뜻하는 이곳 일주문은 승(僧)과 속(俗)이 하나됨을 의미한다. 일주문을 통과하면서 잠시나마 속세의 번뇌를 씻고 심신을 가다듬는 시간을 가져보면 어떨까.

매표소에서 일주문까지 길 옆으로 난 150m 자연관찰로도 천천히 걸어볼 만하다. 1,2m 남짓한 좁은 길에 황토를 깔아 누구라도 편안하게 걸을 수 있고, 족도리풀·은방울꽃·물봉선·산부추·짚신 나물 등의 속리산 야생화를 만나볼 수 있다.

법주사

일주문을 지나 천왕문을 넘어서면 천년사찰 법주사가 웅장한 자태를 드러낸다. 553년 의신 스님이 창건한 이후 8차례의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른 법주사는 국보 3점을 비롯한 수많은 문화유산을 품고 있는 절이다. 법주(法住)는 "속(俗)이 산을 떠나려 하는 곳에 법이 머물도록 정성을 모았다"는 의미.

천왕문 정면으로 보이는 팔상전(국보55호)은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유일한 5층 목조탑. 임진왜란 이후 다시 지은 것을 1968년에 해체, 수리한 것이다. 이 전각에 팔상전이란 이름이 붙은 것은 석가모니가 도솔천에서 내려오는 장면에서부터 사라쌍수 아래에서 열반하는 장면까지 부처의 일생을 여덟 장면으로 나누어 그린 팔상도를 사방 각면에 두 폭씩 그려 놓았기 때문이다.

팔상전에서 왼쪽으로 눈을 돌리면 법주사를 상징하는 거대한 금동대불이 눈에 들어온다. 시멘트불에서 청동대불로, 다시 금동대불이 되기까지 범상치 않은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처음에는 금동대불로 지어졌지만 언젠지 모르지만 붕괴된 것을 1964년 시멘트로 복원했고, 이 역시 붕괴 직전에 이르러 1990년 청동대불로 다시 태어난 뒤 2000년 들어서야 원래 금동미륵불로 다시 지어진 것. 3mm 두께의 황금 80kg가 들어갔다는 안내판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대웅보전에서 팔상전 사이에 서 있는 쌍사자 석등은 국보5호의 걸작. 두 마리의 사자가 앞발을 높이 쳐든 모습에 힘이 넘쳐난다. 법주사엔 또 연꽃 모양으로 조성한 연못이라는 의미의 석연지(국보64호)와 바위에 새긴 마애여래의상(보물216호), 철로 만든 당간지주 등 음미할 만한 다른 문화재가 즐비하다.

속리산 산행

법주사 구경을 마쳤다면 속리산 산행에 도전해 보자. 상주 화북에서 문장대(文藏臺)로 오르는 등산로도 있긴 하지만 법주사를 들머리로 삼는 산행이 일반적이다. 보통 오리숲의 기운이 계속 이어지는 세심정에서 문장대·신선대·천왕봉으로 갈라지는 세 코스에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몰린다.

이 가운데서도 제일 인기있는 등산로는 일명 운장대(雲藏臺)라 불리는 문장대길(1천54m). 맑은 날에도 생기는 문장대 운해가 눈길을 사로잡고, 기기묘묘한 바위가 걷는 즐거움을 더한다. ▲법주사~문장대(6.7km 2시간10분) ▲법주사~천왕봉(6.6km 2시간10분) ▲법주사~입석대(6.5km 2시간) ▲법주사~경업대(5.6km 1시간40분).

*인근 볼거리

법주사가 있는 충북 보은에선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석축산성 가운데 하나인 삼년산성을 만나볼 수 있다. 보은읍 어암리 오정산에 있는 삼년산성은 470년에 축조, 486년에 개축한 것. 삼국시대 보은이 삼년군, 삼년산군으로 불렸기 때문에 삼년산성으로 이름지었다는 설도 있지만 삼국사기엔 성을 쌓는데 삼년이 걸려 삼년산성이라 부른다는 기록이 있다. 이 산성은 납작한 자연석을 이용해 가로쌓기, 세로쌓기로 동시에 축조해 성벽이 견고한 것이 특징. 신라시대 삼국통일의 전초기지 역활을 했던 철옹성으로 고구려와 백제를 동시에 견제하고 진격할 수 있는 절묘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먹을거리

충북 보은은 대추를 이용한 요리가 유명하다. 이 가운데 국보식당(043-543-6369)은 대추왕순대찜(1인 기준 6천원)을 맛볼수 있는 곳. 속리산을 빠져 나와 보은읍 먹자골목까지 발품을 팔아야 하는 수고는 있지만 보은군 지정 향토음식에 선정될 만큼 역사와 전통을 자랑한다. 속에 넣는 부재료로 당면을 쓰는 보통 순대와 달리 대추씨를 갈아 속을 채운다. 몸에 좋을 뿐만 아니라 맛이 담백해 먹어도 먹어도 질리지 않는다.

이상준기자 all4you@msnet.co.kr

사진 정재호기자 newj@msnet.co.kr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