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를 분양받기 위해 수백m씩 줄을 늘어서던 때가 있었다. 대신 줄을 서달라며 아르바이트생을 고용했고, 행여 로열층을 분양받으면 로또 당첨이 부럽지 않았다. 모델하우스를 빠져나올 때면 부동산업자들이 명함을 나눠주며 수백만원씩 웃돈을 줄 테니 분양권을 팔라고 읍소하기도 했다. 그런 때가 있었다. 불과 몇 해 전 일이지만 이제는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처럼 아득한 기억이 됐다. 세월이 흐르면서 입주 후 몇 달이 가도록 불 꺼진 아파트가 늘고 있다. 하염없이 주인을 기다리는 대구 도심의 아파트 숲을 찾았다.
◆입주한 사연도 가지가지
준공 후 미분양 물량이 많은 달서구의 한 아파트 단지. 재건축 과정에서 말도 많고 탈도 많았지만 지난여름 준공과 함께 입주가 시작됐다. 여름방학이 끝나면서 입주율은 50%를 넘어섰지만 한동안 아파트 단지는 썰렁하기만 했다. 똑같은 아파트 단지에서 같은 평형에 살아도 사연은 천차만별이다. 재건축 기간 동안 전세를 얻어 살다가 준공 날짜만 손꼽아 기다려온 사람이 있는가 하면, 부동산 경기가 이처럼 바닥을 헤맬 줄 모르고 조합원 분양가보다 비싼 가격에 일반 분양을 받아놓고 달리 방법이 없어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입주한 사람들도 적잖다. 오후 시간이면 놀이터에 몰려나온 주부들은 이런저런 사연들로 이야기꽃을 피운다. 미입주 사태에 대한 걱정거리와 아파트 가격 문제가 주관심사이다.
재건축조합원이었다는 주부 이은정(35)씨는 "다행히 중형 아파트가 당첨돼서 별다른 걱정을 안 했는데 잔금을 치르면서 대출받은 돈의 이자 부담이 커져서 걱정"이라며 "그래도 아파트 시세가 조합원 분양가 정도는 회복해서 다행스럽다"고 말했다. 옆에서 이야기를 듣던 다른 주부는 한숨부터 내쉬었다. 일반 분양을 받다 보니 당장 2천만원이 넘는 손해를 떠안고 시작했는데 시세는 뚝 떨어지고 미분양 물량이 급격히 늘면서 남편 1년치 연봉이 날아갔다는 것. "등기비용이나 새시 등 입주 부대비용, 대출금 이자까지 생각하면 속이 상해서 잠이 안 올 정도죠. 그나마 작은 평형이어서 가격 회복세가 비교적 빠르다는 걸로 위안을 삼고 있습니다." 곁에 있던 한 주부는 "171㎡(50평)형대에 살고 있는데 한 동에 달랑 두 집만 입주한 상태"라며 "위층에 쿵쾅거리는 소리가 그리울 정도"라며 푸념했다.
수성구도 사정은 비슷하다. 학군 프리미엄을 안고 부동산 불경기를 비켜갈 줄 알았지만 중대형 아파트를 중심으로 준공 후 미분양이 속출했다. 수성 3가에 산다는 한 회사원 황학주(43)씨는 "언젠가는 나아지겠지 하는 막연한 기대감밖에 없다"며 "주위 사람들에게는 수성학군이 좋아서 왔다, 너도 이사 와라고 말하지만 사실 비싼 분양가를 치를 만큼 프리미엄이 있는지 의문"이라고 했다.
중도금, 잔금을 치르지 못해 분양권을 포기하는 사태가 속출하면서 엉뚱하게 이득을 보는 경우도 있다. 장모(51)씨는 올 초 분양가격보다 2천만원 싸게 158㎡(48평)형 아파트를 구매했다. 그가 구매한 아파트는 이미 2003년 100% 분양을 끝낸 곳이었지만 중도에 분양권을 포기하는 사람이 늘면서 아파트 회사 측에서 부동산중개업소를 통해 암암리에 분양가보다도 더 싼 가격에 아파트를 내놓고 있었던 것. 장씨는 "회사 측이 발코니와 방 2곳 확장, 새시까지 무료로 해주기로 해 사실상 금전적인 혜택은 3천만원 상당에 이른다"고 자랑했다. 하지만 이런 고육책에도 불구하고 198㎡(60평)형 이상 대형 평수는 아직도 90% 이상이 비어있을 정도로 입주가 더디다.
◆불 꺼진 아파트의 장·단점
미분양 아파트라고 해서 마냥 걱정거리만 있는 것은 아니다. 입주해 살고 있는 주민들은 조용하고 쾌적하다며 만족감을 나타냈다. 달서구 본리동 한 아파트의 경우, 단지 내 조경이 수준급인데다 최근 주민 편의시설이 속속 들어서면서 주민들은 훨씬 살기 좋다고 평한다. 주민 김연호(70)씨는 "비교적 준공 초기에 입주한 편인데 처음 한두달간은 하루가 멀다 하고 이삿짐 옮기는 소리, 확장 및 새시 설치 소음 때문에 시달렸지만 지금은 정말 조용하다"며 "아직 입주율이 절반을 조금 넘는 상황이다 보니 갖가지 주민편의시설을 이용해도 조용하고 쾌적한 편"이라고 말했다.
달성군 한 아파트에 사는 안성용(46)씨는 "단지 지하에 탁구장이 마련돼 있는데 이용할 때마다 기분이 좋아진다"며 "저녁시간대에는 조금 기다리기도 하지만 입주가 100% 이뤄지지 않다 보니 가족들끼리 운동하기에 상당히 여유로운 편"이라고 했다.
주부 조모(51)씨는 "미입주 가구가 아직 많지만 사는 데는 불편함이 없다"고 했다. 전체적으로 조용한 분위기가 유지되는데다가, 주차장 이용이 편리하다는 것. 조씨는 "대형 평수가 많다 보니 집마다 차량을 2, 3대씩 보유하고 있지만 아직 주차공간이 여유로워서 편리한 점도 많다"며 "입주가 100% 이뤄지면 여느 아파트처럼 주차전쟁이 벌어질까봐 오히려 걱정"이라고 했다.
미입주 가구가 많아 나중에 아파트 시세가 떨어지지 않겠느냐는 주위의 걱정에도 신경 쓰지 않는다고 했다. 대단위 아파트의 이점이 있는데다, 아파트 조경이 잘 돼 있어 크게 가격이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게 그의 견해. 다만 중도에 입주하는 가구가 하나둘씩 생겨나면서 인테리어 소음에 시달린다는 것은 단점으로 지적된다.
자녀를 키우는 주부들은 또래 친구가 없는 것도 고민이다. 주부 이영주(37)씨는 "첫째 아이가 초등학교 3학년인데 이사 온 뒤로 또래 친구를 사귀기가 너무 힘들어졌다"며 "중소형 평형대 위주로 입주하다 보니 아직 첫 아이가 초등학교 입학 전인 이웃들이 대부분"이라고 했다. 다른 한 주부는 "입주가 덜 된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쓰레기 분리수거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엘리베이터에 덕지덕지 붙어있는 전단지들도 그대로 방치돼 꼴불견"이라며 "집들이 온 친구들이 미분양이 심각한 모양이라며 걱정할 정도"라고 말했다.
◆앞으로 기대감과 대책
최근 정부가 종부세 개편안까지 발표하면서 지역의 부동산 시장은 그간 참여정부가 내놓았던 규제에서 자유로워졌다. 특히 종부세 부담 완화는 지역 미분양 시장에 적잖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분석된다. 종부세 과세기준이 9억원으로 올라가면 지역에서는 단일주택으로는 종부세 대상이 사라지게 돼 사라졌던 중대형 아파트 수요가 되살아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지난달 말 대구지역 미분양 아파트 2만3천가구 중 70%가 132㎡(40평)형 이상의 고가 중대형 아파트가 차지했기 때문에 미분양 해소에 도움이 된다는 것. 아울러 1가구 2주택자에 대한 양도세 중과 폐지 덕분에 상대적으로 가격이 싼 지역에서는 다주택 보유에 대한 세부담도 사라지게 된다.
하지만 시장 상황이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국내외 경기가 워낙 얼어붙다 보니 미래 투자가치로 볼 때 주택은 이미 흥미를 잃었다는 분석도 나온다. 단순히 규제를 완화했다고 해서 부동산 시장에 대한 기대심리가 쉽게 되살아날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 때문에 6월 말 기준 대구 2천888가구, 경북 2천79가구에 이르는 '준공 후 미분양' 아파트는 이 같은 부동산 정책 변화의 혜택을 크게 누리지 못하고 늘어만 갈 것으로 우려된다. 분양대행사 한 관계자는 "올 연말과 내년 상반기 준공이 예정된 아파트까지 합친다면 '준공 후 미분양'은 7천~1만 가구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고 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시공사들도 다급해졌다. '준공 후 미분양' 물량을 처리하는 방법은 크게 세가지. 그 중 하나는 직접적인 할인 분양이다. 물론 드러내놓고 싸게 팔지는 못한다. 아직 대구에서 이런 현상이 공공연하게 빚어지지는 않지만 입소문을 타고 15~30%까지 아파트를 할인해서 파는 경우가 있다고 소문이 나 있다. 부동산업계 한 관계자는 "단지 위치나 입주 여건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할인율이 20% 선에 이르는 것으로 안다"며 "시공사가 자금력 있는 사람들에게 20~30가구 단위로 통매각하는데, 이때 매입자는 25%가량 할인된 가격으로 사들이고, 이를 나눠서 분양할 때 20% 정도 할인해주면서 차액을 챙기는 경우도 있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현재 대구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방법은 간접 할인. 보통 잔금 유예가 통용된다. 분양가에서 30~50%가량 잔금이 남아있는 경우 수년간 잔금 납부를 미뤄주는 방식이다. 기존 계약자 입장에서는 불이익을 호소할 수도 있지만 회사 측에서는 더 이상 미분양 물량을 안고 갈 수 없을 때 이뤄지는 방법. 이런 방법으로도 가격이 안 맞으면 미분양 물량을 전세로 돌리기도 한다. 달서구 한 아파트 시공사 관계자는 "아직 전세 여부를 결정하지 못했지만 그에 대한 검토를 하고 있는 것은 맞다"고 말했다. 하지만 시세가 문제다. 분양대행사 한 관계자는 "현재 132㎡(40평)형 이상은 미분양 물량이 너무 많아서 층이나 방향이 좋아도 기존 분양가의 30~35% 정도에 전세가격이 형성되고 있으며, 이보다 적은 아파트는 50%가량에서 가격이 결정된다"며 "시공사 측도 주변 시세에 맞춰 전세가를 정할 것"이라고 했다.
분위기에 따라 다르겠지만, 중소형은 내년 중반기 이후 상당 부분 물량 소화가 될 것으로 보인다. 반면 대형은 최소 수년간 미분양 해소가 어려울 것으로 예상된다. 때문에 중소형은 2년 기본 전세 계약을 한 뒤에 분양전환으로 바뀔 가능성이 크고, 대형은 오히려 안정적으로 전세 상황을 유지할 수 있다. 부동산 중개업소 한 관계자는 "시공사 전세 물량 중에 중소형대는 경쟁도 치열하고 가격대도 기존 물량에 비해 큰 차이가 없을 것"이라며 "하지만 대형 규모를 선호한다면 이런 전세 물량을 노려보는 것도 좋다"고 말했다.
김수용기자 ksy@msnet.co.kr 사진·윤정현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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