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살아가는 이야기)마당 가득 달빛 내리고 하늘엔 별 총총

지난주 모임 하는 날, 문자가 들어온 걸 보니 장소가 바뀌어 용암 박 선생님댁에서 국수를 대접한다 해서 한 사람 두 사람 모였다. 그날 따라 달빛이 훤했다. 좀 늦은 회원님 기다리느라 8시를 넘기고 보니 배는 고프고 구불구불 산길을 돌아 도착한 박 선생님댁에도 마당 가득 달빛이 내려와 있었고 하늘엔 별도 총총했다. 현관문을 들어서니 구수한 내음에 냅다 한 말 "난 국수 두 그릇 먹을 거야" "으이? 배만 채우려고!" 그렇게 구박을 받거나 말거나 단단히 벼르고 상을 받는데 깻잎, 마늘, 고추 등 순 토종장아찌 일색인 밑반찬이 나오자 침이 꿀꺽 넘어갔다. 그런데 사발에 담겨온 것은 희뿌연 하늘에 보랏빛 달이 하나도 아니고 여럿이 둥둥 떠있었다.

알고 보니 흑미로 빚은 새알 수제비였다. 들깨가루로 맛을 낸 수제비는 참말 진미였다. 골속도 채운다는 그 수제비를 한 그릇 반 정도 먹고 나니 쨘했다.

밥상이 나가자 봄에 따서 말렸다는 목련 차를 내어 오셨는데 향기가 그만이었다.

추석을 지났다 해도 올핸 오래도록 여름이 따라붙어 가을 맛이 아직 덜 나는 배도 깎아 먹고 차를 마시는 사이 두런두런 옛이야기 보따리 하나 둘 펴기 시작했다. 누구라 할 것 없이 어찌 모두 달을 보았던지 달밤이야기로 이어졌다. 소싯적 남의 집 장독대만 깨고 그래도 먹어보겠노라 소금에 쿡 찍어 먹은 떫은 감 이야기와 여름 밤 달빛을 등불 삼아 냇가로 갔다 물이 차서 멱은 못 감고 대신 잘 익어 보여 치마보자기가 넘치도록 땄건만 하나도 먹지 못하고 대신 남의 참외밭 망가뜨린 것 물어주느라 혼난 이야기 등 한 사람 한 사람 풀어내는 데 시간이 가는 줄 몰랐다. 그 중에서도 제일 정감이 가는 이야긴 바로 이웃한 멋쟁이 농부아저씨 마음이었다. 이름도 모르는 그분은 해마다 추석이면 이른 벼농사를 지어서 빻아 집집이 햅쌀로 제사를 지내게 하고 또 키우던 소도 잡아서 나눈다는 이야기에 모두들 감탄에 감탄이 저절로 나와 한동안 무엇에 취한 듯 몽롱했다. 그분은 부모님 대신으로 예우한다고 하지만 본인 스스로 농사지은 것을 일일이 미리미리 준비해서 나눈다는 것이 보통 정성이 아님을 알기에 가슴이 짠했다. 그렇게 본론보다 곁길로 너무 깊이 들어가서 회의는 간단히 마치고 나오는데 달은 바로 우리 머리 위에 멈춘 듯했다. 다시금 산길을 요리조리 올라 내리막으로 달리고 있는데 창문으로 갑자기 가을 향내가 전해졌다. 낮의 수은주는 30도 가까웠지만 밤은 언제부턴가 가을맞이로 분주했던가 보다. 싸한 나무 향과 휘영청 달빛에 그만 동동주 한잔도 못하는 난 그만 취한 듯 시리고 아리고 처연한 게 울적하니 옆에 사람이 있어도 막 울고 싶어졌다. 그러자 나올 때만 해도 비교가 되어 시큰둥하던 집에서 기다리는 거라곤 심술이 댓자나 나온 지아비의 고함소리일진대도 양철 쪼그라들듯 얄팍해진 가슴을 부여잡고 달빛보다 먼첨 집으로 마음이 달리고 있었다.

하리(931-033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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