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뻔한 공식? 그게 사람이야기잖아요…방송작가 김인영

TV를 켜고 리모컨을 꾹꾹 눌러댄다. 우연히 멈춘 채널, 드라마에 눈길이 꽂힌다. 얼핏보니 뻔한 이야기다. 신데렐라에 재벌 2세, 반복되는 우연. 30분만 보면 돌아가는 줄거리가 감이 잡히고, 한 회를 다 보면 결말도 짐작이 간다. 그런데 이상하다. 어느 순간, 눈빛이 멍하고 입은 반쯤 벌린 자신을 발견한다. 낄낄거리든, 눈물을 훔치든, '막장 드라마'라며 손가락질을 하든 빠져드는 건 어쩔 수가 없는거다. 이 같은 드라마의 마력은 비현실적인 동시에 현실적이라는 데 있다. 일상에선 불가능할 이야기를 풀어가지만, 그 시대 사람들의 감성과 의식 구조, 트렌드를 가장 민감하게 반영한다. '내게도 저런 일이 생긴다면?'이라는 '물아'의 일체감이 드라마가 가진 매력의 근원이다.

KBS '태양의 여자' 김인영 작가의 작품에는 비루한 현실에 고통받고 상처받으면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여성들이 늘 등장한다. 김 작가는 그녀들의 입을 통해 말한다. '인생엔 견뎌야 할때도 있다('결혼하고 싶은 여자'중에서)'고. 7일 서울 충무로 신세계백화점 내 카페에서 그녀를 만났다. 인터뷰 조건은 하나였다. '나이를 밝히지 않겠으며 기사에도 쓰지 말아줄 것' 왜냐고 물었다. "창작 활동을 하는 사람들은 굳이 나이를 밝힐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요. 나이와 창작물을 연관지어 선입견을 갖거든요." 20대 초반에 드라마 작가의 세계에 뛰어든 그녀가 겪어야했던 좌절과 삐딱한 시선 탓인듯 싶다. 인터뷰보다 사진이 어떻게 나올까 더 궁금해하던 그녀는 내내 즐겁다는 표정이었다. "저, 성격 좋아보이죠?" "아뇨." 기자의 대답. 솔직한 게 죄다.

◆희망과 믿음으로 버텼다

-작가가 되겠다고 결심하게 된 계기는 뭐였습니까?

"1992년 MBC 미니시리즈 '걸어서 하늘까지' 를 보는데 온 몸에 피가 빠르게 돌고 겨울인데도 땀으로 젖더라고요. '아, 나도 저런 드라마 써보고 싶다' 그런 흥분을 몇차례 겪으면서 드라마를 써야만 풀리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독수리 타법으로 타자기를 더듬더듬 쳐서 낸 게 당선이 되고…. 비슷한 시기에 3편이 잇따라 당선이 됐어요. 그러다보니 '나에게 재능이?'라는 '착각'이 들더군요. 내가 만든 이야기를 남에게 해주는데 대한 매력과 마력도 느꼈고요."

-1991년 '가을 소나타'로 작가 부문 신인상을 탄 이후에 1996년 '짝'으로 데뷔하기까지 5년 간 공백이 있었는데요.

"인생이 웃겨요. 생각없이 써낼 때는 계속 당선이 되다가 막상 달려드니까 일이 풀리지 않더라고요. 만나는 PD마다 절 신뢰하지 않는 걸 눈치챘어요. '뭐야? 이렇게 어린 애였어?'하는거죠. 방송사와 영화진흥공사 공모에 내면 꼭 최종심에서 떨어졌다는 연락을 받았고, 대본을 준비하다가도 이상한 이유로 방송이 무산되고…. '마(魔)'가 낀게 아닌가 하는 의심도 들고 힘들었어요. 이 때의 경험이 '메리대구 공방전'을 쓸 때 많이 나왔어요."

-지금까지 미니시리즈만 8편을 했는데 그 중에 최고로 손꼽는 작품은 뭔가요?

"'태양의 여자'와 '결혼하고 싶은 여자'예요. 8편 중에 한 두편을 제외하고는 성공했다고 생각해요. 실패한 작품은 그만한 이유가 있더라고요. 성급하게 준비를 하다보면 캐릭터나 이야기 구조에 대해 충분히 고민하지 못하고 가는 경우가 있거든요. 그런 경우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더라고요."

-작품의 소재와 영감은 어디서 얻는 편이세요?

"살면서 제 마음의 '체'에 걸러지는 것들이죠. 뭔가 하고픈게 자연스레 떠오르고 그 때부터 취재를 시작해요. 대신 영감이 떠오르길 기다리지 않고 여행, 독서, 연주회, 좋은 사람들과의 모임에도 가고 많이 움직여요. 그리고 요리든, 악기든, 운동이든 하고 싶은건 일단 배워봐요. 그러다보면 뭔가 절 자극하고 이야기가 마음 속에 걸려와요. 취재는 신분을 밝히는 경우도 있고, 취업 준비생처럼 가장하기도 해요. '맛있는 청혼'을 쓸때는 요리 자격증이 필요하다 싶어서 중국요리 학원에 5개월 정도 다녔어요. '태양의 여자'에서 퍼스널 쇼퍼(Personal Shopper)를 취재할때는 신분을 밝히고 현장을 취재했죠."

◆주인공은 또다른 나의 모습

-글이 정말 안 써질 때 어떻게 대처하세요?

"대처 방법이 별로 없어요. 방송 중에 글이 안 써지면 정말 살인적인 스트레스를 받아요. 아무리 준비를 하고 대본을 써놓고 시작을 했어도 방송 나가는 걸 보면 수정하고 싶은 것도 있거든요. 결국 막판에 가면 시간에 쫓기게 돼요. 이럴 때는 내가 왜 작가가 됐을까 등등 별별 생각이 다 들고 미칠것 같아요. 스트레스가 쌓이면 책상 앞에서 괴로워하는 대신 동네 수영장에 가거나 동네 한바퀴를 돌면서 운동을 해요."

-유독 여성 캐릭터를 많이 그리는 이유가 뭔가요?

"제가 여성이라 그런지 감정이입도 편하고 대사 쓰기에도 좋아요. 강하고 독하든, 유쾌하고 엉뚱하든 독특한 여성캐릭터를 그리는 일이 무척 재밌고 짜릿해요. 쓰면서도 너무 신나요."

-지금까지 작품들의 주인공 중에서 자신과 가장 닮은 캐릭터는 누구입니까?

"'결혼하고 싶은 여자'의 이신영(명세빈)과 장승리(변정수)를 합친 정도? 사람들은 '태양의 여자'의 신도영(김지수) + 최정희(정애리) 일거라고 하는데 그 정도로 독하지는 않고요. 신도영+윤사월(이하나) 같아요."

-평소 자신이 쓰는 말투나 단어가 작품에 습관적으로 들어가는 게 있나요?

"'태양의 여자'의 최정희가 썼던 '넌 그날 어디 있었니'처럼 '~니'로 끝나는 말을 많이 쓰는 것 같아요. '그랬나?, '그런 건가?'도 자주 나왔고."

-생생한 대사를 쓰기위해 어떤 고민들을 합니까?

"대사를 미리 준비하진 않아요. 한 때 책에서 멋진 문구를 보면 적어놓기도 했는데 나중에 대사에 적용시키면 진짜 안 맞고 겉돌더라고요. 캐릭터에 애정을 갖고 깊이 보면서 쓰는거죠. 또 '이런 대사는 뜰 거야'라고 쓰면 진짜 빛을 못봐요. 오히려 생각없이 쓴 대사들에 사람들이 재밌어하고."

◆한국 드라마를 말하다

-한국 드라마에 공식이 있잖아요. 정형화된 캐릭터에 신데렐라 스토리, 재벌2세, 출생의 비밀 등등. 왜 그런 설정이 빠지지 않을까요?

"일단 그게 인간의 이야기이기 때문인 것 같아요. 신데렐라나 사랑을 잃은 여자가 복수를 하고, 그 과정에서 또 다른 사랑을 만나는 게 동·서양을 막론하고 예전부터 만들어진 '족보'있는 이야기거든요. 그런 이야기를 사람들이 쉽게 용납을 하는 거겠죠. '뻔하지만 저럴수 있겠지'하고."

-가끔 드라마 방영 도중에 작가가 그만두거나 바뀌는 경우도 있잖아요.

"작가가 못 쓰겠다고 포기하기도 하고, PD와 갈등을 빚다보면 일방적으로 다른 작가로 교체하는 경우도 있어요. 저도 예전에 제가 쓴 대본을 다른 작가가 고친 경우가 한번 있었어요. 매우 불쾌하고 상처를 받죠. 그렇게 작가를 흔들거나 바꾼 드라마가 잘 된 경우가 없어요. 극 초반에 시청률이 안 나오면 PD가 대본 뒷부분을 왕창 앞으로 당겨서 이야기를 축약시키고 빠르게 진행을 하기도 해요. 그럼 작가의 페이스가 완전히 흔들려 버려요. 극 후반부로 갈수록 더 급해지고 엉성해지고 오히려 악수를 두게 되죠."

-회당 원고료를 얼마나 받으세요?

"그건 정말 말할 수가 없어요. 2005년부터 작가의 계약금이 확 뛰었어요. 그런데 저는 2004년에 인간적인 의리로 맺은 저렴한 계약이 남아있어서 고료가 높지 않아요. 이번에 다 털어냈으니 이제부터는 제 값을 받으려고요."

◆인간의 모습을 그리고 싶다

-'태양의 여자'의 스토리를 풀어가면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뭐였습니까?

"도영(김지수), 사월, 정희(정애리)의 감정을 따라가면서 쓰는 게 참 에너지도 많이 들고 힘들었어요. 제가 그들이 되어서 쓰니까 두려움, 애잔함, 미움, 복수심 등이 제 마음을 드나들면서 기진맥진했어요. 김지수씨도 도영에 너무 동화되어서 힘들어했고요. 진부한 엔딩을 만들지 않기 위해 고민도 많이 했고요."

-'태양의 여자'를 통해 시청자들에게 전해주고 싶었던 메시지는?

"인간이라 가능한 것과 인간이라 어쩔 수 없는 것. 동생을 버린 언니가 무조건 나쁘다거나 동생이 마냥 착한 피해자라는 전형적인 이야기보다는 언니가 악한 일을 할 수밖에 없었고 이해될 수 있다는 점, 동생도 무조건 착하지 않고 자신의 욕망을 채우고 싶어하는 인간적인 모습을 그리고 싶었죠."

-'태양의 여자'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대사가 뭔가요?

"도영이 아버지의 대사인데요. '가끔 난 하늘에 물어본다. 왜 우리한테 이런 일을 주셨냐고. 우리는 이런 일이 생겨선 안 되는 백 가지 이유를 댈 수 있어. 난 착하게 살았어요, 난 노력했어요, 난 불쌍하게 살았어요. 하지만 하늘은 그래도 그 일이 생겨야 하는 백 한가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해. 지금은 우리가 알 수 없지만 좀 더 나이 들어 알게 되겠지' 지인 중에 작년에 아주 나쁜 사고를 당하신 분이 있는데 이 대사가 나올때 하염없이 울었다고, 그리고 자기를 위해 해준 말 처럼 위로가 됐다는 문자를 보냈더군요. 제가 쓰고 싶은 얘기를 쓰면서 상처받은 사람을 위로할수도 있다는 사실에 정말 감사했어요."

-앞으로 꼭 써보고 싶은 드라마가 있나요?

"발레 드라마를 하고 싶어요. 발레학원이 있는 상가건물에서 용역 청소를 엄마의 딸이 주인공이에요. 엄마를 만나러 갔다가 발레를 보고 반하는 거죠. 재능은 있는데 가난해서 집에서 대걸레 자루를 벽에 걸고 연습을 하고. 거기부터 출발하고 싶어요. 막상 기획을 해보니 제일 어려운 게 배우예요. 발레 전공자 중에서 오디션을 해야하고 공연 장면에는 제작비도 많이 들고. 그래도 꼭 하고 싶어요."

장성현기자 jacksoul@msnet.co.kr 사진 프리랜서 장기훈

▦김인영은?

13년차 스타 방송작가. 1991년 '가을소나타'로 한국방송작가협회 드라마 부문 신인상을 수상하면서 데뷔했다. 그 후 5년을 미치도록 드라마를 쓰고 싶다는 오기와 독기로 버틴 끝에, 1996년 MBC '짝'으로 MBC연기대상 작가부문 특별상을 받았다. '진실', '맛있는 청혼', '결혼하고 싶은 여자', '비밀남녀', '메리대구 공방전', '태양의 여자' 등 10편의 미니시리즈를 집필했다. 사람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울림있는 이야기를 쓰고 싶다는 게 신조. 드라마 같은 사랑보다는 평범하고 따뜻하고 성실한 사랑을 꿈꾸는 그녀는 아직 싱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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