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승이 울고 있었다.
스님이 의아해 물었다. "왜 악몽을 꾸었느냐?" "아닙니다." "그럼?" "좋은 꿈을 꾸었습니다." "그런데 왜 우느냐?" "이뤄질 수 없는 꿈이기에 그렇습니다."
가을은 이런 느낌이다. 상실의 계절이다. 딱히 잃어버린 것도 없는데, 상실감이 밀려든다는 말이다. 탄생인 봄과 생명인 여름을 거쳐 이제 이룰 수 없는 것에 대한 회한과 다시는 올 수 없을 것 같은 미련이 어우러진 정서다.
'가을의 전설'은 한 가족의 파란만장한 삶과 몰락을 그린 대서사시이다. 1880년대부터 근 1세기에 걸친 연대기를 광활한 대지와 세계대전이란 격동 속에 녹여 넣은 작품이다. 짐 해리슨의 원작을 '영광의 깃발'등 시대극에 일가견을 보여준 에드워드 즈윅 감독이 연출했다.
원제에서 'Fall'은 추락의 뜻이다. '몰락의 전설'이 맞겠지만, 가을 분위기에 맞는 아름다운 배경과 음악으로 인해 한국제명 '가을의 전설'이 더 어울리는 영화이다.
'가을의 전설'은 철저히 브래드 피트를 위해 기획된 영화다. '흐르는 강물처럼'(1993년)의 반항 이미지를 그대로 따와 둘째 아들로 앉혔다. 긴 금발에 이글대는 눈빛, 가슴 속 활화산처럼 뿜어대는 열정이 '흐르는 강물처럼'에서 이어지지만, 반항의 수위는 훨씬 높다.
세 아들과 아버지는 모두 계절을 닮았다. 막내 사무엘은 설익은 봄이고, 맏아들 알프레드는 비교적 풍성한 삶을 살아가는 여름이다. 그리고 아버지는 세월을 견디며 살아온 겨울과 같은 인물이다. 몬태나의 추운 겨울을 끔찍이 싫어해 떠난 어머니는 결국 겨울처럼 차가운 남편을 떠난 셈이다.
늦가을에 태어난 트리스탄은 강인한 성격과 반항적인 기질을 가지고 있다. 그는 산 속 거대한 곰인 그리즐리의 영혼을 갖고 태어났다. 그래서 거칠고 거친 곳으로 치닫는다. 사랑도 그렇다. 동생의 여인, 사랑해서는 안 될 사람에게 느끼는 사랑은 그에게 한없이 부담스런 느낌이다. 붉은 심장 옆에 붙은 초록 심장, 마치 원죄의 고통과 같다.
전장에서 동생이 죽자, 야수와 같이 적진으로 뛰어가 적군을 살육하는 것은 그의 주체 못할 원죄에서 나오는 폭력이다. 형제애와 함께 가슴 한켠에 자리 잡고 있던 죄스런 느낌의 한풀이이다.
시인 류인서는 '야성(野性)'이란 시로 그의 짐승같은 거친 이미지를 옮겨왔다. 몸 안에 갇혀 울부짖는 야성은 사랑에 회돌이를 거쳐 강물로, 바다로 줄달음쳐도 식을 줄을 모른다.
시인은 "트리스탄의 핏속에 흐르고 있는 야성을 생명충동으로 읽고 그걸 시로 써 보려했다"면서 "그로인해 자기 파괴의 길을 가기도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것은 결국 닫아 가둘 수 없는 생명력의 확인 같은 것이었다"고 말했다.
트리스탄의 사랑을 '수태하지 않은 아이의 이름을 짓게 한다'고 적고, 고삐 풀린 계절과 같은 그의 운명을 '너는 아무 곳에도 없는 낯선 짐승/눈과 북풍의 산맥을 넘어 나날의 전장으로 가는 사냥꾼'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특히 '쓰러진 나무의 초록심장을 꺼내 묻고'라는 표현은 얼굴에 피를 묻히고, 동생의 심장을 꺼내 든 끔찍한 트리스탄의 초상을 애정 넘치게 순화시키고 있다.
화가 박철호 역시 트리스탄의 방황과 분노, 자유, 가족애, 동생에 대한 연민, 형에 대한 애증 등을 화폭에 담았다. 자작나무의 낙엽들이 흩뿌리는 바탕은 가을에 태어난 아이, 트리스탄의 내면처럼 붉다. 거기에 트리스탄이 손가락에 찍어 바른 피가 선연하게 전면에 드러나고 있다.
거친 바다에서도 채울 수 없는 목마름. 트리스탄의 이미지는 '함부로 길을 나서 길 너머를 바라본 죄'(이문재 시 '노독')와 같은 늦가을의 체념과 알 수 없는 분노까지 담고 있다. 그것은 가을의 처연한 아름다움이었다.
김중기기자 filmtong@msnet.co.kr
▨ 가을의 전설(Legends of the Fall, 1994)
감독:에드워드 즈윅
출연:브래드 피트, 안소니 홉킨스, 에이단 퀸, 줄리아 오몬드
러닝타임:130분
줄거리:윌리엄 러들로우(안소니 홉킨스) 대령은 퇴역 후 몬태나에 정착해 세 아들과 함께 살아간다. 의젓한 장남 알프레드(에이단 퀸), 거친 차남 트리스탄(브래드 피트), 막내 사무엘(헨리 토마스). 어느 날 유학을 떠났던 막내가 약혼녀 수잔나(줄리아 오몬드)를 데려오면서 세 형제는 갈등한다. 1차 대전에 참전하기 위해 세 형제가 떠나고, 수잔나는 내심 둘째 트리스탄을 사랑하게 된다. 영웅심이 강한 사무엘이 전장에서 목숨을 잃고, 알프레드도 부상을 입은 채 돌아오지만, 트리스탄은 동생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돌아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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