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마감 후] 장례식장의 레드 카펫

어떤 계기는 시계추를 단숨에 되돌려 놓습니다. 지난 2일 급박하게 타전된 최진실씨의 자살 소식은 필자의 기억 속 시계를 1990년대 초반으로 되돌려놨습니다.

당시 문화부에서 영화 기사를 썼던 필자는 영화 홍보차 대구에 온 그녀와 인터뷰를 했습니다. CF에서의 애교 넘치는 이미지와 달리 그녀는 말이 적었습니다. 점심을 겸한 당시의 인터뷰는 그녀의 쫓기는 스케줄 때문에 요식적인 수사(修辭)가 오간 자리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당시 촉망받는 신인 여배우와의 만남은 그리 깊은 각인을 남겨놓지 않은채 기억 저편으로 숨어들었습니다. 드라마보다도 더 굴곡 많은 인생을 살다간 그녀의 비극적 최후를 보면서, 인터뷰 당시 받았던 그 느낌이 쓸쓸함이었구나 회상하게 됩니다.

연예인의 급서 소식은 언제나 충격적입니다. TV와 스크린 속에서 울고 웃으며 숨결까지 전하는 그들이기에, 그들의 죽음은 친지의 부고 소식 못지 않은 정서적 충격을 남깁니다. 최씨의 자살 소식은 그녀의 '스타성' 때문에 유례를 볼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뉴스를 낳았습니다. 대중들의 관심도가 높으니 언론의 관심도 쏠리는 것은 당연합니다만, 연예인들의 잇따른 자살 사건에 대한 일부 매체들의 행태는 눈살을 찌푸리게 합니다.

빈소를 찾은 스타들이 연기가 아니라 '진짜' 슬퍼서 오열하는 모습을 훑겠다는 듯 플래쉬 세례를 퍼붓습니다. 충격으로 넋나간 친지들에게 마이크를 들이대며 "슬프냐?"고 묻습니다. 장례식장은 졸지에 영화제 레드 카펫이 됩니다. 이건 집단적 관음증이고 폭력입니다. 케이블TV의 연예채널들은 물 만난듯 합니다. 안재환 사건 때 그랬던 것처럼 최진실 자살사건도 하루종일 반복적으로 틀어댑니다.

최씨에 대한 사채 괴담을 인터넷에 퍼나른 네티즌이 비판의 도마 위에 오르고 있지만, 그 루머들을 검증없이 중계하고 확대 재생산해온 케이블TV 연예채널과 스포츠·연예신문들이야말로 더 큰 악플러일지 모릅니다. 자살이라는 극단적 선택을 한 연예인 소식을 반복적으로 내보내는 것이 '베르테르 효과' 즉 모방 자살을 부른다는 것을 모를 리 없겠지요.

다시 1990년대 초반으로 돌아가 봅니다. 요즘에는 초상권 문제 때문에 상상도 못 할 일이지만, 당시만해도 불의의 사고로 숨진 아동들의 사진을 구해 신문에 싣는 것은 사회부 기자의 주요한 임무 중 하나였습니다. 그것을 제대로 못 하면 사회부장이나 '캡'(사건팀장)에게 '깨지기' 일쑤였지요. 사회부 초년병 시절 "아이 사진 구해오라"는 지시를 받으면 한숨부터 나왔습니다. 비탄에 잠긴 유족들을 설득해 아이들의 사진을 얻어내야 하는 것은 정말 못할 짓이었습니다. 연예인 빈소에 장사진을 친 기자·PD들 역시 비슷한 심경일 거라 추측해 봅니다.

부처를 뜻하는 불(佛)자를 파자(破字)해 보면 '사람(人)이 아니다(弗)'는 뜻이 숨어 있습니다. 뼈를 깎는 수행을 통해 초월의 경지에 들어선 사람이라는 함의이겠지요. 공교롭게도 배우(俳優)의 배(俳)자 역시 '사람(人)이 아니다(非)'라는 의미를 담고 있군요. 슬퍼도 웃어야 하고 기뻐도 울어야 하는 숙명을 타고난 사람들이라는 의미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감정기복이 더 심해 상처를 잘 받는 여린 사람들일 겁니다.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 스타들의 명복을 빕니다.

김해용 기획취재부장 kimh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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