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상의 계절은 각박한 일상에서 문득 눈을 들어 세상을 조망하게 되는 때다. 아무리 크더라도, 상은 상이어서, 노벨상은 뒷말이 많다. 그래도 노벨상은 세상의 두드러진 지형에 대해 많은 것들을 보여준다.
우리에게 가장 흥미로운, 아니 거의 충격적인 것은 일본 과학자들이 넷이나 상을 받은 사실이다. 모든 점들에서 우리는 거의 본능적으로 일본과 자신을 비교한다. 뒷말이 아직도 나오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평화상을 빼놓으면, 우리 과학자나 작가가 아직 노벨상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이 겹쳐, 일본의 경사는 우리로 하여금 자신을 돌아보게 한다.
당장 우리가 괴롭게 새기는 것은 일본과 우리 사이에 존재하는 지식의 격차다. 그런 격차는 개항기 이래 거의 좁혀지지 않았다. 우리의, 나아가서 동양의, 근대화는 일본이 먼저 받아들여 나름으로 소화한 서양 문명의 지식에 의존했다. 즉 일본은 동양의 여러 나라들에겐 서양 문명의 導管(도관)이었다. 이런 구조는 아직도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았다. 우리가 일본에 대해 줄곧 보여온 무역적자가 그 점을 말해주고, 이번 노벨상이 확인해준다.
상을 받은 과학자들의 이력에서 우리 눈길을 끄는 것은 그들이 미국과 가까웠다는 점이다. 물리학상은 소립자 물리학의 '자발적 붕괴 대칭 (spontaneous broken symmetry)'에 관한 업적에 주어졌는데, 이 이론의 창시자인 난부 요이치로(南部陽一郞)는 시카고 대학교에서 연구했고 이제는 미국 시민이다. 그에겐 상금의 반이 돌아갔다. 나머지 상금을 나눈 마스카와 도시히데(益川敏英)와 고바야시 마코토(小林誠)는 난부 교수의 연구를 발전시켰다. '초록 형광 단백질'을 발견한 공로로 화학상을 수상한 시모무라 오사무(下村脩)는 미국 우즈홀 해양생물연구소에서 일했다.
그만큼 세계의 중심부에 가까이 가는 것은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유리하다. 이번의 금융 위기는 지금 세계가 좋든 나쁘든 하나로 통합되었음을 아프게 확인해 주었다. 따라서 '지구 제국'의 주변부에 속하는 우리로선 중심부에 되도록 가까이 가는 전략을 추구해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변두리에서 자족하는 지적 게으름을 과감히 떨치고 중심부로 나아가려는 사람들을 높이는 풍토가 필요하다. 아쉽게도 우리 사회엔 그런 사람들을 헐뜯는 풍조가 거세다. '리먼 브러더스'가 도산하자, 그 투자 은행을 인수하려 했던 산업은행 최고경영자가 '매국노'로 비난받은 일은 그런 풍조를 잘 보여준다. 영국 바클레이즈 은행이 '리먼 브러더스'를 인수하자, 그에 대한 비난은 이내 그쳤다. 문제는, 만일 산업은행이 인수했다면, 비난이 이어졌으리라는 점이다.
우리는 자신이 내린 판단을 스스로 평가할 기준을 갖추지 못했다. 중심부에 먼저 조회하고서야 사물을 평가한다. 이런 사정은 악순환을 부른다. 중심부에 자주 조회하다 보니, 판단에 필요한 정보와 경험이 제대로 축적되지 않고, 그런 부족은 중심부의 평가에 더욱 매달리도록 만든다. 이런 상황에선 창조적 작업을 하기가 무척 어렵다. 어쩌다 창조적 업적이 나오더라도, 평가를 받지 못한다.
물론 노벨상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상을 받을 만한 업적들이 나오지 않는다는 사정과 그런 사정을 고착시킨 주변부의 특질들에 대한 진지한 성찰은 우리에게 긴요하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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