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의창] 깊어가는 가을 밤에

가을이다. 여름내 뜨거운 땀의 결실을 거두는 풍요의 계절이기도 하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기나긴 겨울나기를 준비해야 하는 힘겨운 고비이기도 하다. 지난주말에 결식 청소년들의 월동 준비를 위한 '서재 사랑 나눔의 자리'가 마을 축제에 맞추어 열렸다. 제각각 형편대로 품앗이를 해 음식판을 벌였다. 자기 생업도 접어둔 채 천막을 치고 전등을 가설하느라 정신이 없는 마을 공장의 사장님과 고운 앞치마를 두르고서 연방 신명나는 몸짓으로 부추전을 뒤집느라 평소 위엄은 온데간데없어진 호랑이 학생부장 선생님. 해거름에 자기 집 아이의 입으로 밥알이나 들어가는지는 아랑곳하지 않고서 국밥을 끓이고 설거지를 하느라 또 정신이 없는 동네방네 엄마들과 한참 새침을 떨고 깔끔스러운 티를 내야하는 처지임을 망각하고서 발이 부르트도록 쟁반을 나른다고 여념이 없는 또 다른 신출내기 선생님들까지. 흥겨운 마을 잔치판의 노랫소리는 저 멀리서 무르익어 가고, 등 너머로 들려오는 가락에 짐짓 어깨를 들썩이고 엉덩이춤을 추면서 쑤시는 삭신들을 달래며 함께 어우러진다. 엉거주춤하게 허드렛일이나 거들고 있노라니, "어! 의사 아저씨네~"라는 동네 꼬마 녀석의 외마디 소리조차 정겹게 들려오는 흐뭇한 가을밤이다.

기부를 뜻하는 'donation'은 여러 가지로 읽힌단다. 말만 앞세우지 말고 그냥 '돈-내이숑', 다른 지역의 발음으로는, 기왕에 좋은 일 하는 김에 '더-내이숑', 마침내 이리저리 따지지 말고 그냥 '다-내이숑' 등으로 말이다. 한승헌 변호사 영감님의 '산민객담'이라는 수필집 중의 'donation 연구'라는 대목의 뼈 있는 너스레이다. 물론 돈을 내라, 혹은 더 내라니, 아예 다 내놓아라는 따위의 밀고 당기는 금전적인 흥정만은 아닐 것이다. 단순히 도움을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조금 더 열고 이윽고 온몸과 마음으로 함께 어우러지자는 것이리다. 정치인들이 걸핏하면 떠벌리는 '위민(爲民)'이니 '애민(愛民)'이라는 왕정복고시대의 일방적인 거드름이나 허세가 아니다. '여민동락(與民同樂)'의 본디 자리, 쌍방통행으로 저마다의 희로애락을 다 내어놓고서 끼리끼리 희희낙락하는 잔치판을 벌이자는 것이다. 해서 '불우 청소년을 위한 자선행사'라는 무엇인가를 베풀겠노라는 거룩한 현수막보다는 '서재 사랑 나눔의 자리'라는 맹하도록 질박한 이름이 새록새록 살갑게 다가온다. 해는 져서 어두운데 찾아오는 이웃들이 북적거려, 밝은 달을 쳐다보니 즐겁기 한이 없는 가을밤이었다.

송광익 늘푸른소아청소년과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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