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같은 상부상조(相扶相助·서로 돕고 도움), 십시일반(十匙一飯·밥 열 술 모아 밥 한 그릇을 만듦) 문화를 가진 나라도 드물다. 연말연시는 물론이고 자연재해나 대형인재가 터질 때마다 어려움에 처한 이웃을 돕자는 국민성금 캠페인이 꼭 등장한다. 최근 환율이 급등하면서 '달러 모으기' 운동이 벌어졌다. 그러나 달러 모으기 운동에 대한 국민 정서는 10년 전 IMF 외환 위기 당시 금 모으기 운동 때와 같지만은 않은 듯하다. 달러 모으기 운동에 대해 쏠린 상반된 두 시선을 살펴봤다.
◆달러통장 만들기 넘치는 행렬
지난 13일 오후 대구 수성구 대구은행 본점 1층 영업창구. 이모(63·여)씨가 "신문에서 봤는데 달러를 모은다고 해서…"라며 3천 달러를 내놓았다. 10년 전부터 집에 보관하고 있던 돈이라고 했다. 이씨는 시중에 달러 부족 현상이 가중되는 가운데 대구은행이 달러 모으기 운동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왔다는 것이다.
일부 은행이 지난 8일부터 외화 모으기 캠페인을 벌이자 '장롱 달러'가 금융시장으로 몰려나오고 있다. 대구은행의 경우 지난 9일부터 13일까지 3영업일 동안 485만 달러가 들어왔다. 하루 평균 160만 달러 규모로 지난달까지 하루 평균 20만 달러에 비해 8배나 늘어난 수치. 지난 8일부터 외화 모으기 캠페인을 벌인 기업은행에도 지난 10일 현재 609계좌, 1천708만6천 달러가 모아졌다. 이 가운데 개인 계좌가 539개(542만1천 달러)로 전체 계좌의 88.5%를 차지했다. 농협에도 10일 현재 외화예금 잔액이 10억2천200만 달러가 됐다. 캠페인 전보다 8천800만 달러가 증가한 금액이다.
'달러 모으기 운동'을 독려하는 정치인들의 목소리도 잇따랐다. 한나라당 박희태 대표는 지난 9일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언급한 달러 사재기를 안 하는 것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 금고와 장롱에 있는 달러를 내놓는 게 외환위기를 극복하는 국민적 애국심을 발휘하는 길"이라고 말했다. 같은 당의 김영선 의원은 지난 7일 국감대책회의에서 "전 국민이 외화통장 만들기를 해서 외환위기를 극복하는 게 좋은 아이디어가 될 것 같다"고 제안한 바 있다.
◆국채보상운동 전통·정신 계승
달러 모으기 운동은 10년 전 IMF 외환위기 당시의 금 모으기 운동과 오버랩된다. 1998년 1월부터 두 달간 진행된 이 운동에는 누계 349만명이 참여, 총 21억3천여 달러 정도의 금이 모였다. 유례없는 이 같은 국민운동에 세계가 놀랐다. '파탄난 국가경제를 되살리자'는 정신으로 시작된 금 모으기 운동은 한국경제에 대한 신뢰로 이어졌다.
국가위기에 국민들이 나선 것은 이때가 처음은 아니다. 1907년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은 금·달러 모으기 운동 정신의 원류로 꼽힌다. 대한제국은 1907년 2월 당시 일본에 1천300만원의 빚을 지고 있었다. 이는 국가 재정으로는 도저히 갚을 수 없는 거액이었다. 국토를 일본에 빼앗길 수 있다는 절박함에 거국적인 국채보상운동이 전개됐다. 비록 일제의 훼방으로 실패로 끝났지만 국채보상운동의 정신만은 승계되고 있다.
우리 국민들의 상부상조 정신은 품앗이나 두레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는 기독교 종교에서 기원을 찾을 수 있는 '자선'(charity), 그리스와 로마에서 비교적 대규모로 행해진 '박애사업'(philanthropy)과 비교되기도 한다. 배성우 경북대 사회복지과 교수는 "달러 모으기 운동은 관 주도의 새마을운동같이 국가 정책에 부흥하는 시민들의 자발적 운동이라는 면에서는 긍정적일 수도 있다"고 보았다.
◆만만치 않은 무용론에 회의론
달러 모으기 운동에 대한 여론의 분위기가 우호적인 것만은 아니다. 반대 운동도 벌어지고 있다.
네이버 블로거 '찰떡(ultrabjs)'은 "우리 국민들의 아름다운 나라사랑 정신이 위정자들의 버릇을 아주 잘못 들여놓은 듯하다. 위정자들은 자신들의 잘못과 실패를 덮는 일에 당연하다는 듯 국민들에게 손을 벌리고 있다"고 강하게 질책했다. 토론 사이트인 다음 아고라의 '프랑켄'은 "미쳤습니까? 자기네들이 잘못했으니 자기네들이 책임져야지 왜 아무 상관없고 힘없는 시민들이 감당해야 합니까?"라며 강한 반대 의사를 밝혔다. 지난 7일 다음 아고라 청원 게시판에 올라온 '금·달러 모으기 운동 반대 서명'에는 14일 오후 현재 2천명 가까운 네티즌이 서명을 남겼다. '금 모으기 운동 다시 할 것인가?'를 묻는 투표에는 2400여명의 네티즌이 반대표를 던졌다.
1998년 벌어진 금 모으기 운동의 효과에 대한 부정적 평가도 없지 않다. 당시 금 모으기가 벌어졌지만 ▷모아진 금이 국제시세를 훨씬 밑도는 헐값에 팔렸고 ▷제련에 따른 부가가치가 외국업체에 넘어갔으며 ▷국내 금 유통업 종사자 절반이 실업자 신세가 되면서 '본전도 못 건진' 결과를 낳았다는 것이다. 서민 고통을 발판으로 나라를 살렸지만 그 혜택은 부자들만 챙겨갔다는 자조 섞인 말도 나돌았다.
이번 세계적 경제 위기의 진원지인 미국에서는 오히려 급박한 상황에서도 7천억달러 구제금융 법안을 하원이 한때 부결시키기도 했다. 경제를 이 지경으로 만든 월(Wall)가의 투자은행에 혈세를 퍼주어서는 안 된다는 유권자의 항의 때문이었다. 급한 불을 끄고 나면 미국은 책임 소재를 물을 것이라는 예상도 있다. 배 교수는 이와 관련 "국가 위기 상황에서 금 모으기 운동을 했던 때는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이 돼 있었다. 그러나 공감대 형성이 안 된 현 상황에서 달러 모으기 운동이 과연 성공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라고 말했다.
조문호기자 news119@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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