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하려면 눈높이를 낮춰야 한다. 눈높이만으로는 부족하다. '하심(下心)', 자기 자신을 낮춤으로써 남을 높이는 마음이 동반돼야 한다. 이를 온몸으로 실천하는 이들이 있다. '세상에서 가장 낮은 자세, 가장 느린 속도로 한껏 몸을 움츠려 다시 길을 나서는 여정'에 있는 오체투지 순례단. 이들은 지난달 4일 지리산 노고단에서 첫 삼보일배(三步一拜)의 발걸음을 내디디면서 두달간 200여㎞의 기나긴 여정에 올랐다.
이번 순례는 한국사회를 뜨겁게 달궜던 촛불집회의 연장선상에 있다. 스스로 밝힌 대로 "독단과 독선으로 총체적 난국에 빠져 (국민이) 희망을 잃어가고 있는 시점에서, 우리 자신을 낮은 마음으로 돌아보고 시대의 아픔을 함께 나누는 것"이 순례의 목적이다. 지난 15일 전북 익산시 여산면에서 충남 논산시 연무읍으로 이어지는 1번 국도상에서 진행된 오체투지 순례 현장을 찾았다. 늦여름 대낮의 뜨거운 뙤약볕을 이겨내고 이제 따가운 가을햇살을 맞으며 묵묵히 길을 걷고 있는 30여명의 순례단을 만날 수 있었다.
◆가을들녘 따라 걷는 삼보일배 행렬
순례단 행렬을 발견한 것은 오후 2시쯤. 농부들의 가을걷이가 한창인 들녘을 따라 쭉 뻗은 도로 위로 바짝 엎드렸다 다시 서기를 반복하는 일련의 순례객들이 눈에 들어왔다. 순례단의 선도는 항상 승합차(이 차량 안에는 오체투지에 필요한 각종 집기며 순례 도중 마실 식수와 음료수 등이 실려 있다)이다. 한 구간(140~160m)을 미리 움직이며 도로 상황을 살피는 역할을 한다. 순례단 선두는 문규현 신부와 수경 스님이다. 그 뒤를 전종훈 신부가 죽비로 신호를 하는 지관 스님과 함께 따른다.
이들이 움직인 갓길 곳곳 가득한 돌조각이 순례단의 행로가 쉽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순례단의 한 진행 요원은 "지리산 노고단에서 내려올 때는 자갈이 깔린 땅이라 더 힘들었다"고 했다. 마을을 지나는 좁은 도로는 차와 사람이 한데 엉켜 여간 신경 쓰이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이날 순례단은 진행요원을 포함해 30명 정도. 뒤따르는 순례단 중엔 모녀(母女)도 보였다. 촬영을 나온 불교TV 관계자도 있었다. 오체투지 참가자 중에는 일반인도 많다. 하루부터 일주일 넘게, 혹은 왔다갔다 하며 꾸준히 참가하는 사람도 있다. 문규현 신부가 주임신부로 있는 전주 평화동 성당 신도의 참여도 많다. 보통 주중에는 30~40명이 참여하는데 주말에는 100명 넘는 경우도 많단다. 일주일에 200~300명 정도가 순례에 동참한다는 말이다.
◆씽씽 달리는 차량 vs 슬슬 기는 순례단
순례객들은 죽비 소리에 맞춰 길을 걷고 땅에 엎드리고 절을 한다. 대략 10초의 시간에 삼보일배를 한 번 하는데 그리 넉넉한 시간이 아니다. 초보자들은 앞사람 쫓아 가기에도 바쁘다. 그러니 '몸이 힘들다'는 등의 딴생각을 할 여력이 없다. '무념무상'의 경지로 내쫓기는 셈이다. 시속 80㎞로 지나치는 자동차에 비하면 순례단의 이동속도는 답답하기만 하다. 130~150m의 구간을 삼보일배하기를 반복하며 움직이기 때문. 차로 5분이면 갈 거리도 이들에겐 1시간 거리다. 수경 스님은 삼보일배가 계속되자 수술한 두 무릎이 성할 날이 없다. 일배할 때마다 '어이쿠!'라며 신음소리가 절로 나온다. 진행요원들은 휴식시간마다 스님의 무릎 상태를 살피며 주무르기에 여념이 없다. 그나마 여유있어 보이는 것은 문규현 신부뿐이다.
순례길은 이른 아침의 차가움과 한낮의 뜨거움이 교차하는 아스팔트 위 고행길이다. 그러나 휴식시간 시원한 물 한 잔 건네고 낯선 방문자에 음료수를 나눠주는 순례단의 얼굴에서는 옅은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이날 순례단은 오후 5시 충남 논산시 연무읍 내 원불교 군종센터에서 하루를 마무리했다.
◆참가한 사연은 제각각이지만…
순례단원의 사연도 다양하다. 문화연대 사무총장을 지낸 지금종씨는 촬영팀으로 참여했다. 오체투지 순례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할 예정이다. 차량통제를 맡은 이창건(29·전주)씨는 "오체투지 순례의 정치적·종교적 의미와는 별개로 개인적으로 힘을 얻고자 참가했다"고 했다. 송희철(35·서울)씨는 사장한테 양해를 구한 뒤 한달간 예정으로 참가했다가 진행요원이 됐다. 이들이 이 순례길에서 얻는 것은 무엇일까? 기수를 맡은 명계환씨는 "오체투지가 불교에서 절로 하는 수행인데 이를 통해 자기를 살펴보고 반성하며 자신을 비춰보는 역할을 한다"고 설명했다.
이들의 오체투지 수행 소식은 다음 카페(cafe.daum.net/dhcpxnwl)나 블로그, 인터넷 뉴스 프레시안 등을 통해 상세하게 전해지고 있다. 격려의 메시지도 쏟아진다. 지나가다가 차를 세우고 돈을 보태거나 음료수를 건네는 운전자들도 고마운 분들이다. 어떤 사람은 이들을 향해 월드컵 응원 경적을 울리기도 한다.
'하는 이에겐 고행, 지켜보는 이에겐 고문'이라고까지 불리는 오체투지 순례를 계속하는 이유는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바꾸기 위해서"이다. 또한 나와 너를 구분하지 않고 새로운 공동체를 꿈꾸는 몸짓이기도 하다. 이것이 매캐한 매연을 마시고 굵은 땀방울이 비 오듯이 쏟아져도 이들이 미소를 잃지 않는 이유였다.
글·사진 조문호기자 news119@msnet.co.kr
◆오전 오후 3시간씩 진행…하루 4㎞ 정도 걸어 잠은 공터에 텐트 치고
▷일과:순례단은 오전 6시 기상 후에 식사를 하고 순례 준비를 한다. 오전 8시부터는 30분간 몸풀기 체조를 하면서 출발 준비를 한다. 오전 8시 30분부터 11시 30분까지는 오전 순례. 이게 끝나면 점심시간이다. 오후 순례는 오후 2시부터 오후 5시까지. 오후 6시 저녁식사가 끝나고 오후 7~8시에 회의 및 일정 점검을 한다.
▷식사: 순례단은 트럭을 개조한 밥차에서 지은 밥을 먹는다. 식사 담당도 따로 있다. 점심은 오전 출발 전 만든 주먹밥으로 해결한다. 부식을 정기적으로 구입해 자체 해결하는 것이 원칙이다. 사진 담당인 장재원씨는 찾아오는 분들이 먹을거리를 들고 오지 말 것을 부탁했다. 사다 놓은 부식을 먹지 않으면 상하기 때문이다.
▷숙소:원칙은 텐트에서 자는 것이다. 일반 공터를 찾는데 사람들이 협조를 많이 해 준다는 설명이다. 성직자들은 소형 버스 안에 마련된 숙소에서 잔다. 차 바닥에 매트를 깐 수준이다. 성당 등에서 숙소를 제공한다면 그곳에서 자기도 한다.
▷구간:오체투지 순례는 2차례로 계획됐다. 지난 9월 4일 시작한 지리산~계룡산 구간은 예상했던 11월 1일보다 이른 오는 26일 끝날 것으로 보인다. 내년 3월 시작할 예정인 계룡산~임진각~묘향산 구간은 아직 구체적으로 진행된 계획은 없다고 한다.
▷여정:순례단은 현재까지 매주 월~토 오전·오후 2차례(토요일은 오전만) 각각 3시간씩 오체투지를 진행해 왔다. 100m 이동에 약 27배를 하고 하루 4㎞를 걸었다고 하니 하루에 대략 1천80배를 한 셈이다. 이를 1주일로 환산해 보면 약 6천배가 나온다. 18일까지 대략 6주가 흘렀으니 이들은 3만6천번이나 자신의 몸을 땅바닥에 내던져 온 거다. 한 주를 더 한다면 순례단은 이번 여정에서 약 4만번의 오체투지를 하게 된다.
조문호기자
오체투지(五體投地)란?
인도 불교의 12경례법 중 하나로 이마, 양 팔꿈치, 양 무릎 등 신체의 5부분(五體)을 땅(地)에 던진다(投)는 의미. 고대 인도에서 행하여지던 예법 가운데 상대방의 발을 받드는 접족례(接足禮)에서 유래했다. 주로 하심(下心)과 성찰을 위해 행하는 기도수행법. 자기 자신을 무한히 낮추면서 불·법·승 삼보에게 최대의 존경을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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