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사소액사건을 다루는 법정은 고단한 서민의 삶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곳이다. 2천만원 이하의 빚이나 물건 값 등을 갚으라며 다투는 민사소액재판은 하루에도 수백건씩 열린다. 각각의 사연 속에는 금액의 많고 적음과는 상관없이 '절박한' 서민들의 애환이 녹아 있다. 법정에는 경기한파 탓에 '못살겠다'는 서민들의 하소연이 그칠 날이 없다.
◆단돈 몇십만원 때문에=20일 민사소액재판이 열린 대구지법 제34호 법정. 오전부터 법정 방청석은 돈을 받기 위해, 또는 돈을 갚지 못해 온 사람들로 북적였다. 오전 11시쯤 박모(61·여)씨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딸(29)을 대신해 피고석으로 나왔다. 딸은 몇 달째 카드사용 대금을 연체했고, 이에 카드 회사가 소송을 제기했다. 금액은 200만원. 그리 많지 않은 금액처럼 보였지만 박씨에게는 너무나 큰 금액이라고 했다. 박씨는 "조금씩이라도 나눠낼 수 있겠냐?"는 판사의 조정안에도 선뜻 대답을 하지 못했다.
"돈을 갚을 형편이 못됩니다. 차라리 10년된 냉장고와 TV라도 가져가세요." 박씨는 카드사의 법무팀 직원에게 사정을 했다. "딸이 조그만 회사에서 경리로 일하는데, 월금 70만원을 받아 몇 년째 치매를 앓고 있는 할머니 약값으로, 나머지는 아버지의 사업부도로 망해버린 집안에서 식구 다섯 명이 끼니를 떼우는데 쓰고 있어요. 돈 되는 것은 다 팔아 더 이상은 내놓을 것도 없어요."
"그래도 조금씩이라도 나눠서 내면 안될까요?"라는 카드사 직원의 물음에 박씨는 "올해말이면 또 몇 백만원의 사글세를 내야하는데, 지금은 집세 마련도 어려워 식구가 모두 거리로 나앉을 판"이라며 눈물을 지었다. 이날 조정은 이뤄지지 못했다. 양 측은 어느 정도까지 양보가 가능한지를 결정해 다시 법정에서 만나기로 했다.
김모(40)씨도 원룸 방세와 관리비 150만원을 못내 법정에 섰다. IMF 때 구조조정을 당한 후 몇 명이 동업해 IT회사를 차렸는데 회사는 얼마 가지 못했다. 당시 사업자금으로 빌린 돈을 제때 갚지 못해 가족들과 연락도 끊은채 홀로 사는 김씨는 "막노동을 하며 근근이 입에 풀칠하며 사는데, 요즘은 건설 경기가 안좋아 돈이 한푼도 없다"며 통사정을 했다.
이날 법정에서 처리된 민사소액사건은 150여건. 빌린 돈 50만원과 그 이자를 갚지 못해서, 일을 하고도 임금을 받지 못한 사연도 있었다. 도박에 빠진 사위가 몰래 인감을 가져가 돈을 빌려 쓰는 바람에 대출금 독촉에 시달린다며 찾아온 노부부, 물품 대금을 떼이게 됐다는 하청업체 사장까지…. 법정에는 하루 종일 서민들의 고단한 일상사가 배인 하소연이 이어졌다.
◆줄잇는 소액재판=가파르게 오른 물가, 대출금 이자 등으로 소액을 빌리고도 갚지 못해 법정에 서는 서민들이 최근 크게 늘고 있다. 올들어 8월말 현재 대구지법에 신청된 민사소액 사건은 2만8천414건. 이는 지난해 같은 기간에 접수된 2만6천292건보다 2천122건이 많다. 한 달에 적게는 2천건에서 많게는 5천건이 넘는 서민들의 소액 '법정 다툼'은 대구지법 전체 민사사건의 74.8%를 차지한다.
금액만 보면 소소해 보이지만, 당사자들에게는 몇십억원의 고액사건 못지 않게 절박하다. 너무 억울하고, 속이 상하지만 소송 금액이 몇 십만에서 몇 백만원에 불과하기 때문에 변호사 선임은 엄두도 못낸다. 서툰 법 지식이지만 때로는 '사활을 건' 다툼이 벌어지기도 하고, 깊어진 감정의 골 때문에 재판이 끝난 법정 앞에서 언성을 높인다. 하지만 법정에 오기까지 너무 지쳐버려 마뜩찮은 조정과 결정에도 못 이긴척 수긍하는 경우가 많다.
대구지법의 한 관계자는 "경기 여파 탓인지 소액사건이 끊이지 않는다. 금융권이나 자산관리공사 등에서 카드연체 대금을 청구하는 경우가 많고, 물품대금 때문에 빚어진 개인간 송사도 꽤 있다"며 "도저히 빚을 갚을 여건이 안되는 딱한 사연을 마주하게 되면 답답함을 느낀다"고 했다.
최두성기자 dschoi@msnet.co.kr 임상준기자 zzun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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