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팔공산은 우리나라 산악운동의 요람"

대구경북의 명산이자, 시도민들의 휴식처가 되고 있는 팔공산(八公山). 그 아름다움에 누구든지 감탄해마지 않지만 팔공산이 '한국 산악운동의 메카'라는 사실을 아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

매년 팔공산에서 열리는 '전국 60㎞극복 등행대회'가 산악인들을 대거 배출한 요람이 됐으며, 어릴 적부터 팔공산을 누볐던 대구경북 산악인들이 대한산악연맹을 창립하는 데 중추적 역할을 했다. 도심에 가까이 있어 오히려 그 가치가 희석되는 측면도 없지 않지만 팔공산은 우리나라 산악운동사에서 반드시 조명되어야 할 소중한 존재다.

대구시산악연맹 갈판용(64) 고문. 1961년 대건고 2학년 때 산악부에 들어가 산과 인연을 맺은 후 47년 동안 대구시산악연맹을 든든하게 지켜오고 있는 산증인이다. 대구대 산악부장, 경북산악연맹 상임이사, 대구시산악연맹 전무이사 등을 역임하면서 지역 산악운동 역사를 속속들이 꿰뚫고 있는 그는 팔공산에서 한국 산악운동이 태동했다고 강조했다.

"1959년에 경북학생산악연맹 주최로 팔공산에서 제1회 전국 60㎞ 극복 등행대회가 처음으로 열렸지요. 학생의 날을 기념해 대회가 마련됐고 60년대에는 제주도와 서울, 충청도, 전라도 등 전국에서 2천여명이 참여할 정도로 엄청난 성황을 이뤘어요. 고교, 대학, 일반 그리고 남녀별로 나눠 대회를 치렀는데 대회 참가자들이 반월당~중앙로~대구역을 구보할 때엔 많은 시민들이 몰리는 등 그 열기가 뜨거웠습니다."

지금은 1박2일로 그 규모가 축소됐지만 예전에는 3박 4일 일정으로 대회가 진행됐다. 참가자들은 팔공산맥(가산:1박-파계재-서봉:2박-염불암-수숫골:3박)에서 백안초등학교까지 산행을 한 후 장비검사를 마치고 백안동~동인로터리~삼덕로터리~반월당~중앙로~대구역 16㎞를 뛰어 시민들의 열렬한 박수를 받았다는 것. "가장 짧은 기간에 산악인으로서의 기본 자질을 함양한다는 분명한 교육 목표와 메시지를 가진 대회였지요. 여기에다 대회 장소도 아름다운 팔공산이어서 전국의 산악인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지요. 이 대회에서 산악인으로서의 기량을 닦은 사람들이 전국에 걸쳐 산악인을 배출한 것을 보면 팔공산이 우리나라 산악운동의 요람 역할을 톡톡히 했다고 자부할 수 있지요." 경북학생산악연맹이 주도해 1963년부터 20년 동안 운영한 하계 산간학교도 전국에 걸쳐 산악인을 양성한 곳으로 그 명성이 높았다.

6·25 직후 여러 분야에서 대한민국의 중추적 역할을 맡았던 대구경북은 우리나라 산악운동에서도 발군의 활약을 보여줬다는 게 갈 고문의 귀띔. 그는 "1957년 전국에서 처음으로 경북학생산악연맹이 창립됐다"며 "이 단체를 모태로 경북산악회가 결성되고, 나중에는 대한산악연맹 창립에 결정적으로 이바지하게 됐다"고 했다. 경북학생산악연맹 창립에 앞장선 인물은 김기문씨와 고인이 된 서해창씨. 경북대 사범대와 법대에서 각각 산악부를 이끌던 두 사람은 대구대, 청구대, 효성여대, 계명대와 능인고, 경북대사대부고, 경북고, 대구고 등의 학생들을 모아 경북학생산악연맹을 만들었다. 이 두 사람의 끈질긴 노력 덕분에 1962년 4월 대한산악연맹이 탄생됐다. 1959년 제1회 전국 60㎞ 극복 등행대회에서 전국을 아우르는 산악연맹 단체의 필요성을 논의한 지 꼭 3년 만의 일이었다.

갈 고문은 "1년에 142일을 팔공산을 찾을 정도로 팔공산을 사랑한다"며 "우리나라 산악운동에서 첫손가락에 꼽히는 공헌을 한 팔공산에 대한 체계적 조명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어 요즘 들어 산에 오르는 것을 가벼이 여기는 풍조에 대해서도 원로 산악인으로서 일침을 가했다. "그 산을 자기 것으로 만들려면 횡단, 왕복, 방사, 집중, 학술조사 등의 등반 단계를 다 거치는 것은 물론 4계절에 걸쳐 산을 올라야지요. 봄이나 여름, 가을에 산을 오르는 것은 겨울 등반을 위한 전초작업이라 할 수 있어요. 산이 주는 단맛은 물론 쓴맛까지 봐야 비로소 그 산이 자기 것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대현기자 sk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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