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당시 고교 2학년이던 서용해(51'대구 달서구 용산동)씨는 음악이 듣고 싶었다. 부모님에게 돈을 타내는 것은 어림도 없는 일. 등록금, 하숙비 다 해봐야 6만원이던 시절, '삥땅'쳐도 돈은 턱없이 모자랐다. 당시 36만5천원이던 카세트 '소니CF580'을 30만원 외상 달아놓고 샀다. 처음 들은 곡이 'My way'. 그 순간, 그 얼마나 황홀했던가. 평생'음악'을 쫓게 되는 순간이다.
서씨네 안방은 2천500여장의 LP 레코드판과 각종 엠프, 스피커가 차지하고 있다. 전문 공연장에서나 볼 수 있는 음성보정시스템까지 갖췄다.
창고에 보관된 LP판까지 합하면 서씨가 보유한 레코드판은 4천여장. 이 가운데 2천500여장은 오리지널 음반들이다. 1982년 결혼하면서부터 모은 이들 대부분은 클래식 음반. 국내판은 비교적 최근에 구입한 것들이다.
"하루 일과를 모두 마치면 밤 12시, 여기 음악방에 들어와 음악을 듣고 있노라면 가슴이 뻥 뚫리는 느낌이에요. 피로와 스트레스가 바로 해소되죠. TV는 커녕 잠자는 시간도 아까운 걸요."
서씨에겐 레코드판 한 장 한 장이 보물과도 같다. 저마다의 사연이 숨어있고 자신을 키워온 감동이 묻어있기 때문이다. 음반을 구하기 위한 에피소드도 부지기수. 시내에 음반가게가 성업하던 시절, 신보가 나오는 매주 화요일이면 음반가게에 죽치고 앉아 신보를 기다렸다. 그렇게 해도 구하지 못한 음반은 서울까지 샅샅이 뒤져서 구해야 직성이 풀렸다. 지금도 음반을 꺼내는 서씨의 손길에 애정이 담뿍 묻어난다. 요즘도 수시로 대형 레코드사를 드나들어야 좋은 음반을 구할 수 있다.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할까요. 매주 화요일 신보를 기다리며 마주치던 5명이 2년 전, 모임을 만들었어요. 30년간 매주 만났으니, 보통 인연들이 아니죠." 이 지독한 마니아들은 요즘도 함께 음악을 듣고 함께 행복해한다.
서씨는 인터뷰를 하다가도 음악 설명에 여념이 없다. CD와 레코드판의 음질은 어떻게 다른지, 45회전 이상 고급판과 일반판의 음량은 어떻게 다른지, 똑같은 음악이라도 스피커마다 어떻게 다르게 들리는지, 1980년 녹음된 나훈아의 음반과 최근 음반의 차이는 무엇인지, 우리나라 음악은 왜 '뽕짝'이라 불릴 수밖에 없는지 등 설명과 음악감상이 이어진다.
음반 한 장을 소중하게 꺼내고, 턴 테이블에 올리고, 음량을 조절하는 그의 손길이 한없이 행복해보인다. 애지중지하는 스피커를 통해 나오는 음색을 듣는 그의 표정은 황홀감에 가깝다.
스피커 종류만 해도 여럿이다. 1948년산 미국 알텍사 '604B'는 전국적으로 유명한 스피커. 이 스피커의 음색을 듣기 위해 음악잡지 전문기자들도 찾는다. 국내에는 단 4대만이 수입된 독일 아카펠라 스피커도 서씨의 방 한 켠을 차지하고 있다. '알텍A5'는 서씨가 좋아하는 음색을 감상할 수 있도록 드라이브를 직접 조립해 만들었다. 1992년 NHK를 통해 나오는 세계 유수의 음악회를 보기 위해 일본 에서 직접 위성안테나를 사서 달기도 했다.
좋은 소리를 찾아 전국을 돌아다니는 서씨는 이 때문에 죽을 뻔한 고비도 넘겼단다.
"몇년 전 '오디오를 사겠다'는 내용을 인터넷에 올리니, 탐나는 오디오를 싼값에 팔려는 사람이 있더군요. 긴가민가 했지만 한밤중에 목포까지 차를 타고 내려갔죠. 그런데 이 사람이 계속 장소를 바꿔가며 새벽까지 시간을 끄는 게, 수상하더라고요. 나중엔 머리카락이 쭈뼛 서더군요. 신고를 했는데, 경찰이 잡고 보니 현금을 노린 강도였어요."
이처럼 애지중지 모아왔던 오디오들을 올해 초, 1톤트럭 한 대 분량을 처분해야 했다. 공간이 부족해서 더 이상은 가지고 있기가 힘들었던 것. 영국제 오토그라프 스피커를 팔아야 했던 것이 가장 가슴아프다.
하지만 서씨는 '나의 음악 자산은 기계가 아니라 소스, 즉 음반'이라고 단언한다. 20년 전 아파트 몇 채값을 주고 산 오디오가 지금은 고철에 불과하고, 또 매일 새로운 기술의 기계들이 쏟아져 나오는걸 보면 기계에 담긴 의미는 축소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음반은 다르다. 수십년 전 구입한 음반은 지금도 객석에 앉아있는 듯한 감동을 선사한다. 방안 가득 메우고 있는 레코드판과 CD들은 그에게 가장 소중한 보물들이다.
그의 직함은 다양하다. 자영업을 하는 그는 용산2동주민자치위원장, 달서구주민자치위원장연합회장, 아파트입주자대표회의 회장을 맡고 있고 JC특우회, 청구고등학교 총동창회 부회장 등 각종 단체에서 활동하고 있다. 24시간이 모자랄 만큼 바빠보인다. 각종 단체에다 다양한 취미생활까지, TV 볼 시간도 없다.
'음악을 향한 이 시간과 열정을 어떤 분야에 쏟아부었더라도 성공했을 것'이라는 서씨. 혹시 후회는 없을까. '우문(愚問)'을 하자 곧바로 '현답(賢答)'이 돌아온다. "미련도, 후회도 없어요. 음악만 열심히 들어온게 아니에요. 뭐든 열심히 하며 살아온 걸요."
사실 그의 음악사랑을 두고 '돈이 많고, 여유가 되니 가능한 취미가 아닌가'하고 곱지않은 시선을 보내는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서씨는 고개를 내젓는다. "4천장을 한 장, 한 장 30년간 모았다고 생각해보세요. 광적인 열의가 아니면 돈 만으론 불가능하죠" '돈과는 별 상관이 없다'고 손사래를 친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하나에 수십만원 하는 턴테이블 바늘을 사고 세상을 얻은 것처럼 기뻐할 수 있겠냐는 거다.
서씨의 음악방은 음악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늘 개방돼 있다. 밤새 음악을 듣고 가는 사람들도 허다하다. 혼자 음악 듣기를 즐겨하는 보수적인 음악 마니아들과는 다르다.
이런 서씨의 열렬한 음악사랑은 부인 김은자(50)씨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수시로 손님이 드나들고 많은 돈을 취미에 쏟아붓는 남편에게 불만이 없을까.
"평생 안방을 차지해보지 못했어요. 15평 아파트에서 조금씩 평수를 늘려 40평대까지 이사를 다닌 것도 따지고 보면 남편이 오디오시스템 둘 장소를 넓히기 위해서였죠."
십수년 된 낡은 세탁기'냉장고를 보며 '그 오디오 하나면 집안 살림을 새걸로 바꿀 수 있을텐데'라며 볼멘소리를 하기도 했지만 아내의 진심은 그게 아니다. "남편은 몇 년간 적금을 몇 개나 붓고 대출을 받아 오디오시스템을 장만하곤 하죠. 기뻐하는 남편을 보면 저도 기분이 좋아요. 음악을 들으면 가슴이 그렇게 시원해진다는데, 남자들 스트레스 푸는 방법 하나는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서당개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김씨도 이제 준 마니아 정도 된다. 최근까지도 한달에 일주일은 공연을 보러 다니기도 했다.
그는 요즘 마음의 여유가 없는 도시인들이 마냥 안타깝다. 그래서 여름방학이면 아파트에 주차장에 스피커를 꺼내놓고 청소년음악회를 열기도 한다. 클래식 음악의 아름다움을 공유하기 위해서다.
"음악을 흥얼거리면 우울할 게 없어요. 악기소리가 아름다운 줄 모르고 살아가는 세대, 슬프지 않나요."
마지막으로 그의 일기장에 적힌 글을 옮겨볼까 한다.
"음악이라는 아름다움이 있기에 열심히 살아야 하고, 아름다운 음악이 있기에 난 언제나 행복하다."
최세정기자 최세정기자
사진 정재호기자 newj@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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