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태호(63'대구 달서구 두류동)씨는 책 이야기를 할 때 가장 행복하다. 3만권이나 되는 책에 둘러싸여 자신이 책과 함께 해온 여정을 이야기하는 윤씨의 눈빛은 20대청년 못지 않다. 책 뿐이랴. 꼼꼼하게 매일을 기록한 수필같은 일기, 창고를 가득 메운 잡지들, 각종 스크랩까지, 윤씨의 손때묻은 자료들이 온 집을 가득 채우고 있다.
현재 그의 집 전체는 작은 도서관같다. 최근 이사를 가면서 서대구시장 근처의 살던 집을 서가로 꾸민 것. 방 세 개와 거실은 빽빽하게 책이 차지하고 있다. 3만권이란 양도 양이지만, 그 분야의 다양함을 보노라면 여느 도서관 못지않다.
"어릴 때 다들 가난해서 책을 사볼 수 있었나요. 마을에 단 한권있는 국어사전을 놓고 마을 아이들이 함께 둘러앉아 읽을 정도였으니까요. 남의 집 책 빌려읽는 것도 한계가 있죠. 그때부터 책에 대한 한(恨)이 쌓여왔던 것 같아요."
어릴 때부터 윤씨의 궁금증은 유난했다. 모르는 게 있으면 어떻게든 찾아서 알아내야 직성이 풀렸다. 책은 자연스레 그 길잡이가 되어왔다.
집시처럼 여행하기 좋아한다는 그는 어느 이름없는 비석도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일일이 비문을 베껴와 풀어보길 즐겨한다. 여행 갈 때면 그 지역 관련 책을 모두 꺼내 꼼꼼히 공부하고 떠난다. 아는 만큼 보이기 때문이다. 덕분에 그와 함께 등산하는 친구들은 따로 역사 및 지리 공부를 할 필요가 없다.
책장마다 빽빽이 쌓인 책들을 보고 있노라면 윤씨의 독서인생 역정도 읽힌다. '책 중의 책'이었다고 회상하는 1970,80년대 문고판 책들, 젊은 시절 책상을 치고 울분을 토하며 읽었던 '해방전후사의 인식', 날카로운 지성과 삐딱한 감성이 좋았던 문학과지성사 소설들, 창작과비평, 나이가 들어 현실과 이상의 차이를 깨달으며 다시 발길을 돌려 깊이있게 천착했던 책들…. 관심 분야도 다양하다. 오래 전부터 취미삼아 공부해온 족보들, 이를 이해하기 위한 한국역사'민속'미술'국문학'취미를 넘어선 다도'철학 등 그 뿌리가 뻗어나가는 분야가 어마어마하다.
거미줄처럼 연결된 학문의 실타래를 잡고 평생을 넓혀온 사고의 지평은 끝도 없고 그 깊이도 깊다. 조선시대 선현들의 문집이 빼곡이 꽂혀있는가 하면 대구문학'경산문학'포항문학'영주문학 등 지역문학지들을 빠짐없이 차례대로 모았다. 전국의 시지(市紙)'군지(君紙)도 40%정도 갖췄다. "죽기 전에 시'군지를 다 모아두고 싶어요." 책을 향한 그의 구애는 끝이 없다.
3만권이나 되는 책을 바라보는 그의 눈길이 한없이 따스하다. 책 한권마다 다 사연이 있기 때문이란다.
많은 책을 다 모으는 데에 들었던 돈도 꽤 될법하다. "한두권씩 사모으니까 목돈은 안들었어요. 퇴직하기 전엔 책값으로 한해 150만원 정도 쓴 것 같아요."
'돈 벌면 책을 실컷 사보겠다'던 어릴 적 한을 모두 푼 셈이다.
성주여중'고에서 교편을 잡다가 지난해 퇴직한 윤씨는 지금 만학도의 길을 걷고 있다. 평생 '한'이 되었던 법공부를 다시 시작한 것. 최근 법학 박사학위를 수료하고 이제 '중국법'에 관한 논문을 준비중이다. 그래서 그의 거실엔 중국법'역사'정치 등 중국관련 책들이 가득하다.
얘기 도중 갑자기 독서노트를 내왔다. 수십 권에 이르는 독서노트는 마치 중고생들의 학습노트를 보는 듯 했다. 책의 중요한 내용을 정갈한 글씨로 일일이 메모하고 중요한 부분은 붉고 푸른색으로 기입했다. 책을 읽을 때 마다 이렇게 기록하는 것은 이제 습관이 된지 오래다.
요즘 그는 '책 배달'에 여념이 없다. 이웃들에게 책을 갖다준 후 다 읽은 책은 회수하고, 또 배달하길 즐긴다. 젊은 사람들을 만나면 책 이야기로 열변을 토한다. '독서 예찬'은 그의 영원한 주제다.
"욕심을 내면 절대 독서를 못해요. 책을 한두권, 1,2년 읽는다고 당장 달라지는건 없거든요. 하지만 30여년 교단에서 독서와 성적의 비례관계는 수십번 검증했습니다. 아이에게 '공부하라'는 말을 절대 하지 마세요. 대신 어머니가 책 읽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가장 효과적입니다." 그의 책 이야기는 끝이 없다.
요즘 그는 구본형의 '떠남과 만남', '중국의 권력구조와 파워엘리트', '생명의 강에서 역사의 노래를 듣다' 등을 읽고 있다. 나이가 들면서 읽는 책의 종류도 조금씩 바뀐단다.
"원하는 사람이 있으면 거실에 독서대를 만들어놓고 집을 개방하고 싶어요. 이렇게 좋은 독서, 많은 사람들과 나누고 싶은 것이 저의 꿈이죠."
최세정기자 beacon@msnet.co.kr
사진 정재호기자 newj@msnet.co.kr
댓글 많은 뉴스
국힘 김상욱 "尹 탄핵 기각되면 죽을 때까지 단식"
[단독] 경주에 근무했던 일부 기관장들 경주신라CC에서 부킹·그린피 '특혜 라운딩'
민주 "이재명 암살 계획 제보…신변보호 요청 검토"
국회 목욕탕 TV 논쟁…권성동 "맨날 MBC만" vs 이광희 "내가 틀었다"
최재해 감사원장 탄핵소추 전원일치 기각…즉시 업무 복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