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초점]은행나무 길

너의 노란 우산깃 아래 서 있으면/아름다움이 세상을 덮으리라던/늙은 러시아 문호의 눈망울이 생각난다/맑은 바람결에 너는 짐짓/네 빛나는 눈썹 두어 개를 떨구기도 하고/누군가 깊게 사랑해 온 사람들을 위해/보도 위에 아름다운 연서를 쓰기도 한다/신비로와라 잎사귀마다 적힌/누군가의 옛 추억들 읽어가고 있노라면/사랑은 우리들의 가슴마저 금빛 추억의 물이 들게 한다/

시인 곽재구는 '은행나무'라는 시를 통해 추억과 사랑을 이야기 했다. 은행나무 길은 가을 정취를 느끼기에 제격인 곳이다. 은행나무가 디지털시대에 맛볼 수 없는 아날로그적 향수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노랗게 변한 은행 잎을 보면 책갈피에 끼워두고 싶은 감성이 살아나는 계절, 은행나무 속으로 가 본다.

▨은행나무 길

대구를 대표하는 곳은 공산터널~백암삼거리~도학교로 이어지는 팔공로 6km 구간이다. 평소 드라이브 길로 인기 높은 이 곳에는 1천356그루의 은행나무가 양쪽에 빼곡하다. 따사로운 햇살이 내리쬐는 오후 직접 차를 몰고 가봤다. 불로동을 지난 팔공산 기슭으로 들어선 후 차창을 열자 청량한 바람이 쏟아져 들어왔다. 시원함 속에 어느듯 쌀쌀함이 함께 묻어난다.

공산터널 진입 전 왕복 6차로 양쪽과 중앙분리대에는 단풍나무가 심어져 있다. 머리부터 빨갛게 물들고 있는 단풍나무를 뒤로 한 채 공산터널을 지나 내리막길로 내려서자 은행나무 길이 눈에 확 들어온다. 성급한 놈들은 벌써 노랗게 물들었고 간간히 떨어진 은행 잎이 지나가는 자동차에 이리 저리 날리는 모습이 무척 낭만적이다. 은행나무 열매를 줍는 여인들의 손길이 분주하고 건조를 위해 은행나무 아래에 펼쳐놓은 벼가 가을의 결실을 알리고 있다.

백안삼거리에서 동화사 쪽으로 올라가면 길이 좁아지고 중앙분리대도 없어 은행나무 길의 운치가 더 밀도 있게 다가온다. 가던 길을 멈추고 은행 잎을 줍는 사람들의 모습이 여유롭다. 도학교를 지나면 단풍나무 길이 쭉 이어진다. 산줄기를 타고 내려오는 가을 소식은 은행나무를 대신해 단풍나무가 전해준다.

대구가톨릭대도 빼 놓을 수 없는 은행나무 명소다. 팔공로가 드라이브 길이라면 이곳은 산책하기에 아주 좋다. 은행나무 길은 캠퍼스 곳곳에 형성돼 있지만 정문에서 본관까지 300m는 특히 예쁘다. 잎들이 무성하고 색깔이 고와 캠퍼스의 낭만을 추억으로 남기려는 학생들의 사진 찍기 명소로 알려져 있다.

이밖에 대구 도심에는 봉산육거리~건들바위네거리 0.85km의 이천로와 대구역~달성네거리~평리지하도로 이어지는 2.2km 구간에 은행나무 가로수가 잘 조성돼 있다. 이천로에는 1981년에 심은 230여그루, 대구역~평리지하도에는 수령 20년이 넘은 은행나무가 버티고 있다.

경북에서는 영주 부석사 진입로가 전국적으로 이름 난 은행나무 길이다. 매표소에서 일주문을 지나 천왕문까지 오르막길 500m 양쪽으로 은행나무들이 도열해 있다. 은행잎이 노랗게 물들면 산사의 호젓함과 은행나무의 운치를 감상하려는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이경달기자 sara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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