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문화칼럼] 어디서 무엇이 되어

유구한 시간의 단위 중에 저는 '천년'을 좋아합니다.

인간이 죽어 다시 그 무엇으로 환생하기까지 대략 100년 혹은 200년쯤 걸린다지요? 아마도 뼈와 살과 머리카락이 한 줌 흙으로 돌아가기까지, 그러니까 한 생이 꽃잎처럼 물컹, 향기롭게 썩어가기까지 걸리는 시간이겠지요?

그러나 저는 내세가 있다면 그 다음 생까지의 주기를 천년으로 꿈꾸고 싶습니다. 천년이 주는 그 몽환적인 분위기도 좋지만 이미 한번 든 잠이라면 오래오래 잠들고 싶기 때문입니다. 아, 물론 그러려면 깨어있는 동안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야겠지요. 뜨겁고 치열한 낮을 보낸 사람만이 그 밤의 깊고 달콤한 잠을 맛볼 수 있겠지요?

그렇게 이제 막 복숭아나무 곁에 잠든 사람이 있습니다.

아니, 아직은 깊이 잠들지 못했을지 몰라요. 어쩌면 자신이 죽은지도 모른 채 지나가는 바람 소리 비 소리에 간간 깨어나 뒤채고 있을지 모르겠어요. 그는 참 여리고 섬세한 사람이었거든요. 다정이 병인 양해서 살아생전에도 잠 못 든 밤이 더 많았던 그런 사람이었거든요. 무엇보다 그의 생이 짧아서, 너무 짧아서 다 이루지 못한 사랑, 다 읽지 못한 시, 다 쓰지 못한 글…… 그런 일들을 숙제처럼 머리맡에 수북 남겨둔 채였거든요. 그랬으므로 그는 정말이지 저 붉은 복숭아나무 곁에서 한동안 쉬 잠들지 못할지 모르겠어요.

7월 3일 오전 한 통의 문자가 왔어요. 놀랍게도 그의 부고 메시지가 그의 이름으로 날아왔던 거지요. 잠시 전율이 스쳐갔지만 오랜 투병 중이었던 그였으므로, 정작 자신은 모르고 있었지만 주위 지인들은 이미 각오하고 있던 일이었으므로 끝내 그가 떠난 것을 알아차렸지요. 그 부고는 그의 휴대폰으로 유족이 보냈던 것이었습니다.

살아서 누구보다 천진난만했던 그가, 개구쟁이 같던 그가 저승에서 장난스레 보낸 듯한 한 통의 문자메시지는 그렇게 그 하루를 영영 잊을 수 없는 슬픔으로 찰칵! 정지시켜버린 거지요.

'오오카바마다라'라는 나비를 아시나요? 10월경 캐나다를 출발해 멕시코 숲에서 겨울을 났다가 다시 캐나다로 돌아와 일생을 마친다지요. 그러나 그 이듬해 태어난 유충이 다시 성충이 되어 알을 낳고 그러기를 네 번 반복한 끝에 그 4대째 나비가 다시 멕시코로 떠난다지요?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은 그 길을 그들은 어떻게 아는 것일까요? 대체 누가 그 슬프도록 아름다운 여정에 대해 설명해 줄 수 있을까요?

생각해보니 시인들이 바로 그런 천형의 그리움을 타고난 족속들이 아닐까 합니다. 오래된 누군가의 시구처럼 '사랑하면 할수록 그 갈망에 죽고 만다'는 그리움의 후예가 아닌가 싶습니다. 이렇듯 시를 쓰고, 시를 읽고, 시를 평론하는 일들이 어찌 수천수만 년 유전되고 세습되는 천형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우리 어찌 다시 만나지 않겠습니까?

그러고 보면 천년이란 시간도 저 광대무변의 시간에 비추어보면 하룻밤 꿈에 불과하겠지요. 어쩌면 한순간의 찰나일 수 있겠지요. 무엇보다 분명한 것은 '오늘 그대가 있는 그곳이 내일 우리가 가야할 그 곳'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니 그대 더 이상 죽음 이편을 그리워하지도 말고 추억하지도 말고 아프지도 마십시오. 하룻밤인 양 편히 잠드십시오. 아니, 이미 잠든 사람에게 천년이든 만년이든 그 시간이 무슨 상관이겠어요? 그저 훗날 누군가 그대 어깨를 흔들어 깨우는 그 순간까지 그리하여 우리가 저 빛나던 청춘의 어느 한때 아침저녁 흥얼거렸던 노래처럼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는 그 날까지 그저 안녕히! 부디 안녕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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