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3일 국회 의원회관에 낯익은 얼굴이 오랜만에 나타났다. 노타이의 수더분한 차림으로 두툼한 서류 봉투를 든 정종복(58) 전 의원. 지난 총선에서 낙마한 뒤 5개월여 만에 처음으로 의회를 방문한 것이라고 한다. 4년 내내 내집처럼 드나들었지만 낙선하자 너무나 먼 곳이 돼버리는 게 의원회관인 모양이다.
"방사성폐기물관리공단 경주 유치의 당위성을 담은 성명서에 경북 의원들의 서명을 받기 위해 찾았지만 의원회관은 무척 낯설게 느껴졌습니다. 의원 14명 전원이 흔쾌히 서명해줘 고마웠습니다. 특히 친박근혜계 의원들이 고마웠어요. 고령·성주·칠곡 지역구로 친박이었던 이인기 의원이 가장 먼저 서명했습니다."
그는 지난 총선 공천 당시 사무부총장이었다. 공천 심사위 활동을 처음부터 끝까지 챙기는 역할이었다. 그런 만큼 수많은 사람들의 청탁을 받았다. 들어준 것보다 못 들어준 게 더 많다. 한나라당 공천 경쟁률이 7대 1을 웃돌았으니 못 들어준 것이 들어준 것보다 최소 7배는 된다. 본의는 아니었겠지만 그만큼 적(敵)을 많이 만든 셈이다.
'이명박 대통령 만들기'부터 공천까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실세(實勢)여서 지역구도 못 챙겼다. 결과는 낙선이었다.
그에게 방사성폐기물관리공단의 서울 또는 경기도 이전 소문은 '앉아서 용만 쓰는 앉은뱅이'의 심정을 실감케 한 사건이었다. "지난 7월부터 내년 1월 발족할 공단의 소재지를 두고 논란이 일었습니다. 정부 일각에서 7월 21일 공단 설립 준비위원회를 열어 공단 소재지를 수도권에 두는 정관을 의결하려 했지요. 중저준위 방사성폐기물처리장(방폐장) 유치로 한수원 본사가 경주로 오기로 돼 있고, 지금도 고준위 방폐물의 54%를 월성원전에 임시보관하고 있는데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발길이 바빠졌다. 한수원의 업무 중 중요한 두 축이 발전과 방폐장 관리인데 한수원은 경주로, 방폐물관리공단은 수도권에 두는 것은 경주 시민을 속이고 우롱하는 것밖에 안 된다고 각계를 설득했다. 이것이 먹혀들었는지 7월 준비위가 유보됐다.
그 사이 성명서에 경북 국회의원 14명이 서명했고, 백상승 경주시장, 이상효 박병훈 도의원 등의 노력으로 지방의원 54명의 서명도 받았다. 김관용 경북지사가 대정부 건의문도 냈다. 서울과 경북도-경주시가 한몸처럼 긴박하게 움직였다.
이달 10일 준비위가 개최되기로 했다. 정 전 의원은 지난 8일 이상득 의원을 만나 공단 문제를 제기했다. 이 의원의 반응은 "그게 아직도 경주로 결정나지 않았느냐"는 것. 그리곤 어디엔가로 전화했다.
이어 9일 지식경제부 관계자가 정 전 의원에게 연락이 왔다. 정관 내용에 대해 협의하고 싶다는 것. '공단은 임시로 경기도에 둔다'는 문구가 '공단의 주된 사무실은 경주에 둔다'로 바뀌었다. 내년 1월 1일 법인 설립 등기도 경주시에 하기로 약속했다. "내년까지 간판은 최소한 경주에 달고 직원 20명, 30명이라도 경주에서 일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합니다. 지식경제부가 그렇게 약속했어요."
기금이 7조3천억원에 이르고 매년 기금이 수백억원씩 추가 적립되며, 직원수 200여명으로 출범하는 방사성폐기물관리공단 경주 유치의 개가(凱歌)를 그렇게 올렸다.
이로써 경주의 오랜 논란 거리인 한수원 본사의 경주시내 이전 문제의 해결 고리도 만들어졌다고 했다. 양북면 장항리에 짓기로 했던 한수원을 경주 시내로 옮기되, 양북 등 동경주에는 공단과 다른 인센티브를 준다는 것이 정 전 의원이 제시하는 해법이다. 에너지박물관, 한수원연수원 등이 인센티브다.
경주시내와 동경주가 '윈윈'하자는 이 해법에 완강하게 반대하던 동경주 주민들도 '확실한 인센티브를 제시하라'는 정도로 분위기가 다소 누그러지고 있다고 한다.
개각이나 청와대 개편 때면 어김없이 하마평에 오르내리는 그에게 이명박 정부에 대해 물었더니 "초기 국정지지도가 낮아 안타까웠다"며 "이 대통령은 시동이 늦게 걸리는 편이라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결국 성공할 것"이라고 했다. 그는 우파 정권이 이 정권으로 끝나서는 안되기 때문에 반드시 성공해야 하고, 자신도 다음 우파 정권의 창출을 위해서 혼신의 노력을 다할 생각이라고도 했다.
최재왕 서울정치부장 jwchoi@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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