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발(發) 금융위기가 포항과 구미공단에도 직격탄으로 날아들고 있다. 체력이 약한 중소기업들은 말할 것도 없고, 굴지의 기업들마저 잇따라 감산에 들어갔다. 내년에도 회복이 힘들 것이라는 예상에 따라 연말을 기점으로 명예퇴직이나 희망퇴직을 통한 감원을 추진 중인 기업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공단 관계자들은 "'위기'라는 단어만으로는 표현이 부족한 것 같다. 연쇄도산 같은 극단적인 상황을 가정해야 할지도 모른다"며 "경기진행 상황을 지켜보면 소름이 돋는다"고 했다.
◆감산(減産)은 불가피한 선택=한국 철강의 산실인 포항공단 업체들의 용광로 열기가 이달 들어 급격하게 식고 있다. 업계에 따르면 포스코와 동부제철 등이 감산에 들어갔거나 시기를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주된 수요산업인 조선·자동차·건설업 경기가 수직 추락 중인 것을 보면 철강업체 감산은 피할 수 없다는 추세다.
특히 H빔 같은 형강류나 철근 등 건설자재를 취급하는 업체들은 이미 직격탄을 맞았다는 분석이 많다. 24시간 생산체제인 A사의 경우 이달 중 8일, 다음달에는 10일가량 작업시간 단축을 통한 감산계획을 짜놓고 있다.
구미공단에 소재한 LG계열사들도 최근 투자를 계속하고 있지만 경쟁력이 약한 TV 관련 일부 생산품목의 라인을 평택 등 수도권 사업장으로 이전한다는 등의 소문이 나돌고 있다. 협력업체들은 생산물량 감소에 대한 불안감에 시달리고 있다.
삼성전자 구미사업장 역시 내년 3월 베트남 생산공장 준공을 앞두고 있는데다 최근 중국 현지 생산법인의 업무 확대 계획 등으로 구미지역 협력업체들은 생산비중 감소를 걱정하고 있다. 협력업체 관계자는 "삼성의 글로벌 전략으로 국내 휴대폰은 생산물량 및 생산인력 감소가 불가피해 전망이 아주 어두운 실정"이라고 말했다.
◆"더 떨어질 것" 주문이 없다=포항공단 철강업체 관계자들은 "현재 아파트 시장과 철강시장이 너무 닮았다"고들 했다. 그나마 조금씩인 수요가들마저 "12월 이후에는 더 떨어질 텐데 조금만 더 기다리자"며 아예 주문서를 내지 않으면서 시장침체를 부추기고 있다는 것이다.
B사의 임원은 "본격적인 불황은 4분기(10월)부터 시작이고 내년 2분기(6월)까지는 회복기대를 갖지 않고 있다는 게 업계의 공통된 견해"라며 "문제는 과연 그때까지 버틸 수 있느냐는 것"이라고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 게다가 내년 하반기 이후 회복 전망도 막연한 기대일 뿐 구체적인 근거가 없다는 사실이 업계를 더욱 위축시키고 있다.
내수·수출을 합쳐 자동차 판매량이 줄면 자동차용 강판을 비롯한 부품업계에 들어가는 철강재 소비가 줄고, 건설물량이 감소하면 철근·H빔·쉬트파일 같은 건설·건축용 자재 판매가 줄고, 기업들의 설비투자가 줄면 산업용 기계 등에 들어가는 철강제품이 줄고….
IMF도 견뎠다던 포항이 신음하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때는 소비재 산업이 먼저 죽고 난 뒤 철강이 가장 늦게 타격을 받았는데 이번에는 사단의 출발점이 국내가 아닌 미국으로, 장기불황을 우려한 기초소재 산업이 먼저 몰락하면서 포항철강 산업이 가장 우선 순위에서 충격을 흡수하고 있다는 점이 10년 전과 구분되는 사실이다.
◆성과급 축소, 감원, 경비 축소=올해 순이익 규모가 1천억원 안팎이 될 것으로 예상했던 포항의 C사는 이달 초 '비상경영체제 돌입'을 선언했다. 환차손 규모가 최소 3천억원 넘게 될 것 같다는 추정치가 나왔기 때문이다.
이런 예상이 실제 결과로 나타난다면 연말 직원들에게 200% 안팎으로 지급할 예정이던 성과급을 지급할 근거나 여력이 없어진다. 대형 철강사 대부분이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이런 속사정은 비슷하다.
또 D사는 주가폭락, 환차손, 매출부진 등 악재라는 악재는 다 겹쳤다며 감원준비에 들어갔다. 부부사원 중 한 사람, 장기근속자, 단순업무 종사자 등을 감원 우선순위로 정하고 그것으로도 부족하면 정리해고에 버금가는 초강력 감원조치 단행방침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업체들의 경영도 초긴축으로 전환됐다. 대다수 포항공단 업체들은 일단 올 연말까지 일반 경비지출을 최소화하기로 했다. 이로 인해 포항지역 소비시장 경기도 급랭하고 있다. 회식이나 점심시간 외식 최소화 조치가 내려졌고, 각 부서별 경비용으로 지급했던 법인카드를 회수하는 업체도 늘면서 횟집 식당 등의 매출액도 크게 떨어졌다.
구미공단 내 중소기업체들 역시 최근의 불황을 이기지 못하고 감원하는 업체들이 속출하고 있다. '마른 수건도 다시 짠다'는 초긴축 경영 방침으로 불필요한 경비 지출을 최소화하고 있는 것. 이 때문에 회식 등 회사 모임도 급격히 줄어 지역 식당가는 심각한 운영난을 겪고 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키코 피해 등으로 벌써 부도난 기업도 있고, 유동성 위기를 겪으면서 조만간 몇 개 업체가 더 쓰러질 수도 있다는 말들이 금융권 주변에서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중소기업진흥공단 경북중서부지부에 따르면 이달 들어 중기청의 정책자금을 지원받은 기업 중 4개 중소기업체가 부도난 것을 비롯해 키코 피해를 호소하는 6개 중소기업체에 대해 자금상환 만기 연장 또는 상환 유예 조치를 한 것으로 밝혀졌다.
구미·이창희기자 lch888@msnet.co.kr 포항·박정출기자 jcpark@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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