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조두진의 책속 인물 읽기]빈방에 달빛 들면

정양

나는 병을 앓아 30년 동안 하루도 제대로 버틸 기력이 없었는데, 당신이 어린애를 대하듯 나를 돌봐주며 때맞춰 먹여주고 입혀주었소. 집에는 쌀 한 톨 없었지만, 내가 술을 좋아하는 걸 알고 난리통(병자호란)에 도망가는 와중에도 술은 떨어지지 않게 해 주었소. 삼척의 산중에서 식량이 떨어졌을 때, 당신은 소나무 껍질을 벗겨 먹어 굶주린 기색이 역력했지만, 나만은 평소와 다름없이 술 마시고 배불리 먹게 해주었소. 그런데 이제 누구를 믿고 술을 마셔댈 수 있겠소.

(중략)

(당신) 얼굴색이 까맣게 타들어 가 옛날의 꽃다운 모습을 다시 볼 수 없게 되었는데도, 내가 어리석어 근심걱정도 하지 않았구려. 나는 줄곧 신경쇠약으로 당신에게 마구 화를 내고 욕을 하며 마치 원수나 해충 보듯 '왜 안 죽나'하기까지 했소. 내가 함부로 거칠게 대한 잘못을 속죄할 길이 없구려. 앞으로 나는 결코 새장가를 들거나 첩을 두지 않을 것이며, 고생고생하며 여생을 마칠 작정이오.

조선 선비로 한성부 서윤을 지낸 정양(鄭瀁·1600∼1668)이 먼저 세상을 떠난 아내에 대한 아쉬움과 슬픔을 토로한 제문(祭文)이다. 당시 조선 사람들, 특히 양반들은 가까운 사람이 죽으면 으레 제문을 써 그 죽음을 위로하고 자신의 슬픔을 표현했다. 양반들은 아내를 향해 좀처럼 솔직한 마음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제문에서는 애틋한 마음을 드러내도 흉될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선비들이 쓴 제문은 대체로 체통보다 솔직한 심정을 담고 있다. 덕분에 조선 선비들의 제문은 당시 생활상과 양반들의 속마음까지 들여다보는 기회가 되곤 한다.

제문으로 볼 때 정양은 아내 덕에 호의호식하면서도 아내를 무척 박대했던 모양이다. 이 제문은 아내 잃은 슬픔을 담고 있지만, 따지고 보면 '소처럼 일하던 당신이 죽고 나니 누가 저 너머 사래(이랑) 긴 밭을 갈 것인가. 이제 내가 방문을 열고 나서면 누가 냉큼 가마를 대령할 것인가. 당신이 없는데 누가 내게 따뜻한 밥과 맑은 술을 올릴 것인가. 오호 통재라. 이렇게 아까운 당신에게 나는 어째서 그런 욕을 해댔을까. 아∼ 나는 앞으로 닥칠 불편과 가난을 감수하더라도 새장가를 들지는 않겠다'는 말이다. 물론 정양이 아내의 죽음을 안타까워한 나머지 자신의 잘못을 과장했을 수도 있다.

남편 뒷바라지하느라 제 삶을 포기하고 갖은 고생을 한다는 아내의 이야기는 요즘도 흔하다. 종일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하느라 자기계발은 꿈도 꿀 수 없다고 말한다. 대학교육까지 받았지만 아내 노릇, 엄마 노릇 하느라 청춘을 다 보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정양의 아내처럼 사는 아내는 불행하다. 그러나 많은 경우 남편들도 힘겹기는 마찬가지다. 정양처럼 무책임한 남편은 무척 드물다.

아내와 마찬가지로 많은 남편들도 자기 꿈을 포기하고 먹고사는 일에 몰두한다. 아침 일찍 일어나 먼 밭으로 나가 종일 긴 이랑을 가는 남자들은 그 짓이 좋아서 하는 게 아니다. 별로 공정해 보이지 않는 직장상사의 욕을 먹으면서도 히죽거리는 것은 속이 없어서가 아니다. 밤늦게 걸려온 전화를 받고 냉큼 달려나가는 것은 술이 좋아서가 아니다. 아내의 도끼눈, 아이들의 실망하는 눈빛을 몰라서가 아니라 그것이 삶임을 알기 때문이다.

(집집마다 다르지만) 아내가 집에서 밥하고 빨래하고, 아이들을 먹이고 입히면서 한평생 사는 일, 남편이 땀흘려 일해서 돈을 버는 것은 사람살이의 평범한 모습이다. 그것을 '사람이 할 짓이 아니다'라고 규정해버린다면 너무 야박하다.

제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예술가의 꿈을 잊지 않고 뛰어난 업적을 남기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평생 지겨운 노동을 통해 먹고살고, 자식을 키우는 일은 중요한 일이다. 사람은 부모 아래에서 자라고, 자란 후에는 자식을 기르고, 자식을 기른 후에는 늙고 죽는다. 그 삶을 '억울하다'고 말하면 사람이 설자리는 무척 좁아진다.

'나는 아내(혹은 남편)를 보살피고 자식 키우느라 평생을 보낼 수는 없어요' 라는 말은 사람살이를 모르고 하는 말이다. 사람이 죽기 전에 해야 할 일은 그다지 특별한 게 아니다. 그러니 당신, '예술가의 꿈'을 간직하되 '밥벌이'를 외면하지는 마시길….

조두진기자 earf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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