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아웃사이더들에게

소외라는 단서를 달면 동의하지 않거나 불쾌함을 유발할 수도 있겠다 싶어 머뭇거리다가 그냥 씁니다. 여기서 제가 소외라는 단어를 선택한 까닭은 판매를 겨냥한 미술시장(각종 아트 페어, 옥션, 갤러리 등)으로부터 구애를 받지 못하여 시장의 선택에 비켜서 있거나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분발하고 있을 화가들을 염두에 두었습니다. 그러니까 황무지를 개간하는 일꾼들에게 보내는 새참이기를 바라지만 맛과 영양은 저도 장담 못합니다.

수많은 이들이 미술대학에서 순수미술을 전공하거나 그 외의 통로로 미술계에 진입하지만 일생동안 작업에만 몰두하며 화가로 살아가는 경우는 아주 드뭅니다. 그건 마치 수많은 공장에서 헤아릴 수 없는 각종 제품을 만들어 내지만 오래도록 유통되는 상품이 적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이라는 판을 새로 짠다 해도 동일한 결과에 이를 가능성이 높고 이러한 구조는 적자생존이라는 개념으로 수용되어왔습니다.

21세기에 접어들면서 미술이 세상과 소통하는 대표적 통로는 시장에서의 반응이고 이 반응이 화가의 명예와 성공여부를 결정하는 잣대가 되었습니다. 이에 대한 다른 의견이나 시선은 미미하거나 시장의 그늘에 가려져 있습니다. 대중매체 또한 문화의 다양성을 이야기하지만 그들의 속성은 탑 브랜드를 추종하고 전파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 보니 상업성이 곧 미학이 되어버린 게 아닌가 싶은 시대입니다.

이러한 풍토가 만들어내는 빛과 그늘은 보다 뚜렷합니다. 지난 해 미술계는 투기 자본이 몰려와 미술계에도 빈익빈 부익부라는 선명한 경계를 그었는데 소위 양지 쪽에 편입된 화가들은 소수였고 대부분의 화가들은 깊은 상심의 시기였을 겁니다. 어쩌면 몰락이라는 표현이 맞겠지요. 언론매체를 장식하는 미술시장의 소식들에 세인들이 시선을 돌리고 있을 때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렸을 대다수의 화가들은 캄캄한 터널을 지나고 있었겠지요. 화려한 조명 뒤에서 몸서리치도록 피폐했을 겁니다.

국내 미술시장에서 스타가 된 화가들의 작품은 고가로 거래될망정 예술적 유효성은 희미합니다. 이미 그들의 그림은 사회를 변혁시킬 힘도 없거니와 희망조차 박제되었습니다. 시장이라는 호랑이 등을 타고 그저 실려 갈 뿐입니다. 지금 유명세로 세인들에게 거래되는 그림들은 브랜드 가치 이외는 시대를 울릴 공명조차 들리지 않습니다. 기껏 거장들이 이룩해놓은 미적 후광을 누리는 거지요.

그동안 소외감이라는 경험은 새롭고 귀중한 열망을 잉태시켰을 겁니다. 그 열망이 황무지를 일구고 시장이 아닌 시대를 견인하는 역동적인 미술이 되어 우리 곁에 오기를 기다리고 또 기대합니다.

김창태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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