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마니아와 함께 떠나는 세계여행]루마니아 거리의 개들

골목길과 대로에서 벌이는 생존 경쟁

루마니아의 고도 브라쇼브에 머물 때였다. 나는 민박집 투숙객들과 함께 브라쇼브 인근 야산을 오르고 있었다. 산꼭대기에는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허물어진 유명한 성채가 하나 있었는데 지금은 그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이미 5년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 루마니아 어느 시골마을의 낡은 성채가 내 기억에 선명하게 남아있는 이유는 바로 그 녀석 때문이다.

산꼭대기는 그리 높지 않았지만 산길이 험해 오르는 것이 쉽지 않았다. 걸음이 느린 나는 일행을 먼저 보내고 혼자 떨어져 산길을 더듬고 있었다. 그 때 풀숲에서 불쑥 녀석이 나타났다. 아무도 없는 산길에서 혼자 덩치 큰 개 한 마리를 갑자기 맞닥뜨린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순간 얼음이 돼버렸다. 멈칫거리며 녀석의 눈치를 살폈다. 눈빛이 사람처럼 처연한 이상한 개였다. 녀석은 나에게는 관심도 없다는 듯 풀썩 주저앉아 무심히 뒷목을 긁고 있었다. 나는 마음이 놓여 다시 산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내가 한 걸음을 떼어놓자마자 녀석이 부시럭거리며 일어나더니 내 발꿈치를 쫓았다. 나는 놀라서 걸음을 멈추고 천천히 녀석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녀석은 내 발꿈치를 바짝 쫓아왔음이 분명하건만 능청스럽게 앉아 딴청을 피웠다. 나는 걷다가 멈추고 걷다가 멈추고를 반복하며 녀석을 살폈다. 예상대로 녀석은 내 발꿈치를 바짝 쫓고 있었지만 내가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볼 때마다 아무 일 없다는 듯 딴청을 피웠다. 녀석은 절대 내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한참을 올라가다 잠시 주저앉아 쉴 때면 녀석은 멀찌감치 떨어져앉아 처연하게 먼 산을 바라봤다.

녀석의 정체를 파악한 건 갈림길에서였다. 갈림길에서 녀석은 성큼 나를 앞질러 방향을 잡더니 기특하게도 내가 따라올라올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물론 눈길은 여전히 먼 산에 두고서 말이다. 녀석은 지금 나의 외로운 산행의 길잡이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그리고 아주 오랫동안 이 일을 해온 듯 프로처럼 노련하게.

가끔씩 녀석은 귀를 쫑긋 세우며 들개처럼 눈빛을 번뜩였는데 그 때마다 조금 후엔 사람들이 나타났다. 다른 사람들이 스쳐지나갈 때 녀석은 순간 나와 그 사람을 번갈아 보며 나를 계속 쫓아올지, 아니면 저 사람을 따라갈지 고민하는 듯 했다. 하지만 곧 마음을 정한 듯 녀석은 나를 따라왔고 끝까지 의리를 지켰다. 우리는 산꼭대기에 도착했다.

산꼭대기의 허물어진 성채를 천천히 둘러보는 동안 녀석은 계속 내 곁을 지키더니 다시 내려가는 길까지 동행했다. 그리고 산 아래 등산로 입구까지 다 내려왔을 때 나는 갑자기 혼비백산했다. 나와 녀석을 둘러싸고 스무 마리가 넘는 개떼가 몰려든 것이다. 그렇게 많은 개들이 내 주위에서 한꺼번에 짖어대는 소리를 나는 처음 들었다. 정신이 아찔한 찰나 녀석은 이소룡처럼 멋진 자세로 '붕~' 날아오르며 1대 20으로 개떼를 상대했다.

녀석의 눈빛은 전쟁터에 내던져진 잔인한 살육의 눈빛으로 돌변해 있었다. 놀랍게도 녀석은 스무 마리를 모두 물리치고 그 처연하고 무심한 눈빛으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처음으로 내 눈을 똑바로 마주했다. 나는 녀석에게 고개를 끄덕여주고 근처의 작은 슈퍼마켓에 가서 소시지 몇 개를 사갖고 나왔다. 녀석은 문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더니 소시지를 당당하게 물고 거만한 뒷모습으로 멀어졌다.

루마니아의 도시에는 횡단보도 앞에서 기다리다가 신호동이 파란색으로 바뀌면 사람들과 함께 길을 건너는 놀라운 개들을 볼 수 있다. 거리마다 개들이 너무 많아서 관광객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다. 루마니아인들은 원래 개를 너무 좋아해서 집집마다 꼭 한 두마리씩은 길렀다고 한다. 그러나 80년대 차우체스쿠 정권 시절 대규모 아파트 단지들이 건설되고 아파트에서 개를 키우는 것이 금지되면서 수천 마리의 개들이 한꺼번에 거리에 버려졌고, 개들은 생존을 위해 스스로 무리를 짓고 번식해왔다고 한다.

일행을 만나 돌아오는 길에 나는 녀석을 다시 목격했다. 그리고 그 마지막 한 장면 때문에 지금까지도 나는 녀석을 잊을 수가 없다. 녀석은 시속 100킬로미터가 넘는 속도로 차들이 질주하는 2차선 도로 한복판에 황야의 무법자처럼 서있었다. 잠시 숨을 고르고 녀석은 달려오는 차를 향해 맹렬하게 뛰어들었다. 나는 겁에 질려 소리를 꽥 질렀다. 깜짝 놀란 차가 휘청거리며 '끼익~' 섰다. 녀석은 살아있었다. 차 유리창으로 고개를 내민 운전자가 녀석을 향해 큰 소리로 욕을 했지만 녀석은 물러서지 않고 운전자를 똑바로 쳐다보며 짖어댔다. 20대 1로 개떼와 싸우던 전쟁터의 눈빛이었다. 운전자는 욕하기를 포기하고 무언가 음식봉지 같은 걸 던져주었다. 녀석은 그제서야 봉지를 물고 물러났다.

나는 충격을 받았다. 산길에서 길잡이 노릇을 하면서, 그리고 이렇게 달리는 차에 목숨을 걸고 뛰어들면서 먹이를 구하는 녀석의 놀라운 생존방식은 내 마음을 울컥하게 했다. 나는 지구의 어느 한적한 고속도로 위에서 '생존'이라는 것의 잔인한 속성을 적나라하게 목격해버렸다.

미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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