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가을의 기도

며칠 전 시골에 사는 친구가 잘 익은 사과 한 상자를 보내왔다. 붉고 향기로운 가을 맛이 상자 가득 넘쳤다. 연년이 이렇게 가을을 거저 얻어먹자니 벗에게 꽤나 마음이 쓰였다. 고맙다고 전화를 하자 그는 농 삼아 '이제 우리 서로 여유도 있으니 베풀며 좀 살자'는 권고성 충고의 말 한마디를 던지는 것이다. 친구야 교회를 통해 늘 사랑을 베풀기에 이런 말을 쉽게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듣는 나로서는 아픈 데를 꼬집힌 느낌이었다.

남들은 쉽게 잘도 꾸려 가는 생을 무엇 하나 제대로 이룬 것 없이 나는 여태 계절조차 잊은 채 끙끙대며 살아왔나 보다. 이제부터 나도 주변을 돌아보며 살아야겠다. 혼자만의 힘으로 벅차면 기도의 힘으로 닿게 해야지.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 (중략) …… 사랑하게 하소서 …… (중략) ……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 같이. -김현승의 「가을의 기도」 부분

욕망과 고뇌와 불안의 청년기는 '굽이치는 바다'였다. 불안한 정치 상황 속에서도 조국의 영광과 행복을 위해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오기도 하였다. 오늘은 지나온 삶을 겸허히 받아들일 한 마리 '까마귀'가 되어 마른 나뭇가지에 앉아 본다.

그러고 보니 이 가을에는 해야 할 기도가 너무 많다. 적어도 나의 삶은 받은 것에 대한 갚음으로 내일을 보람 있게 꾸려가게 하소서. 그늘진 곳에 떨고 있는 자를 위하여 따스한 볕이 되게 하소서. 기아로 죽어가는 먼 나라의 어린 영혼들을 외면하지 말게 하소서. 캄캄한 절망 속에서 살아가는 북녘 동포들에게 자유의 진정한 의미를 알게 하소서. 노동의 소중함을 알고 한 조각 빵에도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을 가지게 하소서. 치솟는 환율과 거품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서민들의 불안을 덜어 주소서. 너무 이기적인 젊은이들에게 희생적 봉사 정신의 보람을 알게 하소서, 가문 땅에 단비를 내리소서. 시인이 부르는 노래가 삶의 지혜이고 사랑이고 희망이게 하소서…….

십자가나 불상 앞이 아니어도 좋다. 옛날 우리 어머니들은 정갈한 마음으로 뒤란의 감나무 아래서나 우물가 장독대에서도 잘도 빌지 않았던가. 적어도 나의 기도가 하늘의 문에 닿을 수만 있다면 나의 모국어는 이 가을 더욱 빛나리라.

친구가 보내 준 사과는 가을 내내 내 정신의 향기로 서재를 메우리라. 아직도 늦지 않다. 넉넉하진 않지만 지금부터라도 나는 내 분에 맞는 삶에 충실하리라. 내가 해야 할 기도는 절대 고독이 아닌 더불어 사는 삶으로 꽃피기 바란다.

공영구(시인·경신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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