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장옥관의 시와 함께] 허전한 인사/박상순

허전한 인사

박상순

아내가 옷장 정리하다 십 년 넘은 양복을 이제 버리자고 한다. 두어 벌의 새 양복이 옷장에 걸리는 동안, 한 번도 입지 않은 양복을 버리자고 한다. 털이 다 빠지고 소매 낡아 몸에도 맞지 않는다. 어깨가 좁고 소매가 달랑 올라붙었다. 뿌리양복점이 문 닫은 지 이십 년이 지났는데, 옷장에는 아직 뿌리양복점이 걸려 있다. 안주머니에 뜨겁던 젊은 날이 아직 남아 있으려나. 비닐봉지에 싸여 구석으로 밀려난 양복을 꺼낸다. 휑하니 불어오는 바람의 문을 닫는다. 젊은 날 수고 많았다.

나이 든 남자라면 누구나 경험하였으리라, 첫 양복의 기억. 첫 키스처럼 영 잊히지 않는 기억. 첫 양복은 비로소 어른이 되었다는 증거였다. 양복을 챙겨줄 부모가 없어 숙모의 손에 이끌려 양복점 문턱을 넘었던 사람이 있었다. 난생처음 목돈 주고 맞춘 양복이 아까워 옷장에 걸어놓고 바라보기만 하다가 간 사람도 있었다. 다름 아닌 우리 집 이야기이다.

그런데, 맞춤양복이라니. 그것도 이십 년이 넘은 양복을 버리지 못해 망설이다니. 돈이 아까워서 그런 것은 아닐 터. 그 옷에 깃든 '젊은 날'을 쉽사리 지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젊은 날은 가고, 뿌리양복점도 문을 닫고, 시인도 정년을 맞이했다. 지방도를 따라 깊이 들어간 벽촌. "대한민국 중학교 2학년/아홉 명의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해 오지 중의 오지를 골라 다녔던 교직. 낡은 양복 밀치듯 나이를 벗는다. "수고 많았다", 젊은 날이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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