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웃사랑)'급성골수성 백혈병' 박태학씨

골수이식 후유증…검버섯 핀 '42세 노인'

▲ 갑작스레 찾아온 백혈병과 수술 후유증으로 힘들어하는 박태학씨는 오랜 병에 시달린 노인 같았다. 하지만 명상에 잠길 때만큼은 검버섯이 도드라진 얼굴도 조금씩 밝아졌다. 윤정현 인턴기자
▲ 갑작스레 찾아온 백혈병과 수술 후유증으로 힘들어하는 박태학씨는 오랜 병에 시달린 노인 같았다. 하지만 명상에 잠길 때만큼은 검버섯이 도드라진 얼굴도 조금씩 밝아졌다. 윤정현 인턴기자

"두그릇은 먹어야 빨리 낫겠지요."

죽 그릇을 앞에 둔 박태학(42)씨는 바싹 말라 있었다. 검버섯이 온몸에 핀 박씨의 몰골은 영락없는 노인이었다. "마흔둘, 양띱니다"라고 자신을 소개하지 않았더라면, '67'로 시작하는 주민번호를 보지 않았더라면 '식욕 좋은 노인이 병상에 앉아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눈에 힘을 주고 있다는 게 느껴질 정도로 온 신경을 눈으로 몰고 있었지만 박씨는 녹내장으로 눈이 먼 지 5년째라고 했다. 형체가 있다는 것만 알 뿐, 밝은 쪽은 아예 안 보인다고 했다.

"갑자기 이렇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지요. 입원하기 전까지 공사판에서 일을 했으니까요."

5년 전 백혈병이 갑자기 찾아왔듯 골수이식 수술 뒤 찾아온 후유증도 갑작스러웠다. 피부가 벗겨지면서 검버섯이 생겼고 폐에 공기가 차면서 숨쉬기가 힘들어졌다. 후유증은 시력도 앗아갔다. 이 모든 것이 1년 만에 찾아들었으니 박씨의 말대로 "'찰나(刹那)'의 시간에 '상전벽해(桑田碧海)'"가 돼버린 셈이었다.

박씨의 고단한 인생역정은 진행형이다. 8세 되던 해 어머니를 사고로 잃고 22세에 독립했다는 박씨. 피붙이 없는 울산의 자동차 부속품 공장에서 일했다. 그러던 중 25세 때 고향 청도에 계신 아버지 박예문(69)씨의 실명소식을 접했다. 10년 넘는 타향살이를 마치고 아버지와 가까이 있기 위해 대구로 온 것이 2002년. 하지만 삶은 이듬해 더 고단해졌다. 2003년 2월 어느 날 이빨과 잇몸 사이에서 피가 쏟아졌다. 조금만 부딪치면 멍이 들었다. 무릎에 생긴 손바닥만한 멍은 며칠간 온몸에 떠다녔다. '급성골수성백혈병'이었다.

골수이식수술은 운좋게도 석달 만에 이뤄졌다. 문제는 이식 후 몸이 새 골수에 적응하기까지의 기간. 후유증이 급속도로 진행됐다. 하지만 박씨는 모든 걸 긍정적으로 여기고 있었다. "덕분에 사람의 고마움을 알게 됐다"는 박씨는 도인 같은 모습이었다. 사실 박씨를 돌봐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버지는 1급 시각장애인이어서 박씨를 돌볼 형편이 못됐고 골수를 내준 남동생 역시 월세로 근근이 끼니를 이어가고 있다. 하루에 4시간 정도 경북대병원 호스피스들이 무료로 간병해주는 것 외엔 주변에 아무도 없었다. 때문에 같은 병실을 쓰고 있는 환우의 보호자들이 십시일반식으로 나머지 시간 동안 간병을 맡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박씨는 "예전에는 시끄러운 게 싫었는데 지금은 사람들이 곁에 있으면 마음이 편하다"고 했다.

시각을 잃은 박씨는 하루 대부분을 불교음악을 듣는 데 보낸다고 했다. 취재 중 들리는 노래는 '자비송'이라고 했다. '악과 고통에서 벗어나길 바라며, 내가 행복하길 바라는 것처럼 다른 이도 행복하길 바란다'는 자비송. 자비송을 들으면서 명상에 잠기면 마음이 푸근해진다고 했다.

박씨는 자신보다 17년째 눈이 멀어 있는 아버지를 더 걱정하고 있었다. "경북 청도의 100년도 더 된 집에 혼자 살고 계신다"면서 마른 눈물을 삼켰다.

박씨는 "하루 세번 아버지께 안부전화를 하고 있다"고 했다. 10㎝ 앞에 글자를 갖다대도 안 보인다는 아들이 단축키를 눌러 전화를 걸면 눈먼 아버지가 더듬더듬 수화기를 들고 서로가 끼니는 챙겼는지 혹여 다친 데는 없는지 묻는 장면이 눈앞을 스쳤다.

"아버지를 다시 뵐 때는 손으로 서로를 확인하진 않았으면 좋겠네요. 다시 건강을 되찾아 눈 수술을 받을 수 있다면 아버지를 편히 모실 수 있겠지요."

김태진기자 jin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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