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고 일어나면 펀드는 떨어져 있고, 실물경제는 연일 위기란다. 하루도 빠짐없이 누군가의 자살 소식이 뉴스를 채운다.
우울하기만 한 사회. 치유를 위한 음악이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 이런 시기에 박기영의 음반은 고맙기만 하다. 싱어송라이터 박기영(31)이 최근 발매한 스페셜 음반 '어쿠스틱 + 베스트(Acoustic + Best)'는 현대를 사는 한국인들을 치유해주는 음악을 가득 담았다.
"EBS의 음악 전문 프로그램 '스페이스 공감'에 출연해 제 노래를 언플러그드 음악으로 편곡해 불렀어요. 그런데 반응이 좋았죠. 그래서 앨범으로 만들게 됐습니다."
'어쿠스틱 + 베스트'에는 앞서 발표한 박기영의 히트곡과 신곡 세 곡이 드럼·베이스·기타·피아노 등 어쿠스틱 악기로 연주돼 실렸다. 박기영의 목소리 역시 앨범 분위기에 맞게 편안하고 깊다.
"한국 사람들, 너무 스트레스를 많이 받잖아요. 치유를 위한 음악이 필요한 때예요. 그런 음악을 들려주는 게 음악인으로서 제가 해야 할 일이기도 하고요."
겉모습만 어쿠스틱이 아닌, 진짜 어쿠스틱을 원한 박기영은 음반을 '원테이크' 방식으로 녹음했다. 보통 가수들은 음반 녹음작업을 할 때 악기 소리와 목소리, 코러스 등을 따로따로 녹음해 하나로 만드는 방법을 쓴다. 반면 박기영은 보컬을 비롯한 모든 악기를 녹음실에서 동시에 녹음해 음반을 완성했다.
"제대로 된 원테이크 녹음을 하기 위해 하루에 8시간씩 보름 넘게 연습을 했어요. 그랬더니 욕심이 생겨서 시디 2장 짜리 음반을 만들고 싶었죠. 하지만 나 좋자고 음반을 만드는 것도 아니니까 욕심은 버렸죠."
공 들인 음반의 음악은 그의 욕심대로 팬들에게 차분하고 따뜻한 멜로디를 선사한다. 작가 신경숙의 소설 '리진'에서 받은 영감을 노래로 옮긴 타이틀곡 '그대 나를 보나요'는 이별 뒤에도 멀어지지 못하는 연인들의 안타까움을 애잔한 음색에 담았다.
가수 호란과 듀엣으로 부른 '동행'은 두 가수의 매력적인 보컬이 어우러져 독특한 감성을 남긴다. 이밖에도 '시작' '마지막 사랑' '블루 스카이' 등 박기영의 전작들이 어쿠스틱한 옷을 입고 이 음반을 통해 팬들을 만난다.
여유를 갖고 돌아온 10년차 가수 박기영은 부쩍 떨어진 가요계 불황에 대해서도 담담하게 자신의 생각을 말한다.
"과거와 달리 뮤지션이 소모품이 됐죠. 음악 역시 마찬가지고요. 그런데 그건 현대 사회에서 막을 방법이 없는 것 같아요. 전 그저 그 안에서 어떻게든 사람들이 제 노래를 듣고 마음을 치유하기만 했으면 합니다."
1998년 데뷔해 참 치열하게 살아왔던 박기영이었다. 4집까지는 매년 음반을 내며 열정적으로 젊은 시절을 보냈다. 음악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과는 어울리지도 않았다. 고집도 셌고 타협도 몰랐다.
그랬던 박기영은 여행을 하게 되면서 자신을 많이 바꿨다. 넓은 세상에서 다양한 사람을 만나며 고집과 편견을 버렸다. 대신 여유와 관조를 배웠다. 그는 지난해 4월에도 스페인 산티아고에 한 달 동안 순례여행을 떠났다. 한 달을 꼬박 자신의 다리에만 의존해 걷고 또 걸었다. 무려 800km를 걸었다. 당시의 도보여행을 지난 5월 '박기영씨 산티아고에는 왜 가셨어요?'라는 제목의 책으로 발간하기도 했다.
"피레네 산맥에서 길을 잃어 낭떠러지에 떨어져 죽을 뻔하기도 했어요. 당시에는 그 길을 걷는 게 너무 고통스러워 그냥 그 자리에서 주저앉고만 싶었죠. 조금 빨리 가려고 다른 길을 택했다가 그런 일을 겪었어요. 그 일을 통해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여행을 통해 배우는 것은 많다. 박기영은 당시 여행을 통해 사람들 사이에서 소통의 중요성도 알게 됐다.
"여행의 즐거움을 말해 뭐할까요.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들과 얘기하면서 세상도 많이 배워요. 세상에 소소하고 많은 얘기들을 혼자 갖지 말고 사람들이 서로서로 만나서 소통을 했으면 좋겠어요."
이번 어쿠스틱 음반은 산티아고 여행을 통해 얻은 교훈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뮤지션은 사람들이 느끼는 것을 대신 표현해 주는 사람이기도 하죠. 이번 음반은 사람들에게 '당신만 그런 게 아니라 우리 모두 그렇다'는 걸 전하는 음반이에요. 여행을 하며 느낀 행복과 기쁨의 원자들이 음반을 통해 전해졌으면 해요."
박기영은 여유와 관조를 자신의 삶에서도 실천했다. 최근 김포로 이사를 가 고양이 두 마리와 조용하게 산다. TV를 없앴더니 삶이 한결 여유로워졌다는 그녀다.
"소소한 내 삶이 만족스럽고 좋아요. 연예인이 아니라, 좋은 음악을 들려주는 뮤지션이라는 얘기를 듣기만 하면 되요. 나중에 제가 아이를 낳으면 아이 친구들이 제 아이에게 '엄마의 사인을 받아달라'고 하는, 그런 뮤지션이 됐으면 해요."
아직 미혼인 그녀의 입에서 '아이'에 대한 얘기가 나왔다. 결혼에 대한 생각이 궁금했다. 박기영은 자신의 책에도 '둘리'라는 애칭의 연인을 공개했다.
"지금은 만나는 사람이 없어요. 그래서 음반은 참 빨리 만들었죠. 진짜가 뭔지 아는, 따뜻한 사람과 만나고 싶어요. 누군가를 다시 만난다면 세상에 딱 둘만 있는 것처럼, 그렇게 살고 싶어요."
폭풍같은 20대를 뒤로하고 잔잔한 호수가 돼 돌아온 그녀. 박기영의 따뜻한 음악이 힘든 세상에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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