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의사 정현주의 휴먼 토크]가을에는 풍요롭게 하소서

요즘 밖에 나가보면 길거리에 나뒹구는 낙엽들이 만추(晩秋)를 예고한다. 결실의 계절이 왔음을 알리는 가장 확실한 증거는 동네 과일가게다. 가게마다 유난히도 무덥고 가물었던 올여름의 보상으로 과일들이 수북이 쌓여 탐스럽기만 하다. 도도한 미인처럼 수려한 과일인물에 비해 올해는 가격이 허무해서 농심(農心)을 헤아리면 마음이 무겁지만 그래도 흉년이 아닌게 다행이다 싶다.

과수원 이름부터 예사롭지 않은 '명품과수원'은 배가 주종인 과수원으로 대구 외곽에 자리잡고 있다. 오랜 지인이면서 환자이기도 한 과수원 주인은 신지식인 농부로 알고 지낸 연륜만큼 그 과수원과 관련한 묵은 추억도 넉넉히 갖고 있다. 그에게는 배꽃이 만발한 봄의 과수원은 환상속의 화원마냥 아득하다. 달빛과 꽃 그림자가 어우러진 과수원에서 '와인 파티'라도 열라치면 온 우주가 내 것인 양 황홀했다. 가을이면 과수원 가득히 봉지에 싸인 배들이 나뭇가지를 꺾을 기세로 휘어져 땅으로 내리 꽂혀있다. 그렇게 배 나무는 충만한 생명력 앞에 초라한 인간능력에 한계를 느끼며 거역할 수 없는 초자연적 전능에 대한 경외심을 상기 시키곤 했다.

그리고 가을 끝자락이 되면 배즙이랑 상자에 담긴 탐스런 배들이 마치 아이들 시험성적표처럼 어김없이 집으로 배달돼 온다. 이에 대해 감사의 인사말과 함께 어줍잖은 상품평도 곁들이며 한해를 마감한 세월이 벌써 강산을 바꾸게 한 세월이다.

올 가을에는 주인장의 인상이 많이 구겨져 있을법 하다. 인간의 힘으로 한 치도 변화시킬 수 없고 하나도 가감할 수 없는 정직한 햇빛과 바람, 흙 등 자연의 힘으로 인해 이 가을에 넘쳐나도록 풍족한 결실을 얻었지만 인간들이 만들어낸 금전적 잣대로 인해 과일들이 찬밥신세를 당하고 있는 것이다. 거의 모든 과일의 가격이 폭락해 수확하려해도 인건비조차 건질 수 없어 여름철 내내 무거운 열매를 달아 키우느라 고생을 한 나뭇가지에 그대로 방치하고 있는 현실이다. 휘어진 가지에 탐스럽게 보이는 봉지싼 배가 힘겹게 인공호흡기에 목숨을 부지하는 중환자마냥 처량하기만 하다.

사회전체가 현실로 일어나지 않는 염려로 세상이 끝날 것 같은 공포에 휩싸여 있다. 요즘 들어서 신문 지면이나 TV화면을 어지럽히는 각종 지표를 나타내는 숫자의 조합들이 공룡처럼 거대하게 우리들을 짓누른다. 죽거나 죽이거나 죽고 싶은 사람들이 넘쳐나고 있는 볼썽사나운 사회가 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올해 가을은 유난히도 맑은 하늘에다 작열하는 햇빛, 만발하는 단풍, 아름다운 공기, 넘치는 과일, 잘 익은 곡식 등으로 가득하다. 그저 자연으로부터 받은 것들은 모두 풍요한데 우리 인간들이 만든 것은 죄다 빈약하기만 하다. 주식 및 펀드 수익률이 그렇고, 아파트값'땅값, 그리고 우리들의 마음은 기대치 이하다.

인간들이 만들어 낼 수 없는 형형색색으로 물든 단풍 옷을 갈아입은 대구 앞산과 팔공산을 바라보면서 나지막히 읊조려 본다. 이 가을에는 모든게 다 풍요하고 가득히 넘쳐나게 하소서. 053)253-0707, www.gounmi.net (고운미피부과의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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