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박기섭의 목요시조산책] 황폐한 옛집에 서다/오종문

고통의 삶 빼고 나면 살날 그 얼마인가

산다는 건 또다시 많은 죄를 짓는 일

오래된 마음의 감옥 무시로 갇히는 일

그래, 내 기억에서 무엇을 지운다는 건

어떤 추억 속에 마음이 폐허 되는 것

그 위에 욕망의 집 한 채 또 세우고 허무는 것

모른다, 어른 된 지금 아직도 갈길 잃고

상처 곪아 터지도록 견디고 또 견디었을

힘들게 살아온 길을 되돌아보고 있는지

오늘 한 날씩 슬리는 가을 햇살 경영하며

세상에 감나무 한 잎 물들일 수 있다면

황폐한 그 집 골방에 편한 잠 잘 수 있으리.

단풍 구경을 간다고요? 처처에 불타는 저 감나무는 어떻습니까. 갓 맑은 하늘 쟁반에 담긴 감빛도 감빛이지만 잎은 또 잎대로 하나의 경이지요. 어디 산자락을 태우는 감밭에라도 들라치면 사람의 입성은 한낱 남루에 지나지 않습니다.

산다는 건 무시로 죄를 짓고 스스로 마음 감옥에 갇히는 일. 고통의 기억을 애써 지워도 마음은 늘 폐허 위를 떠돌 뿐. 상처가 곪아 터지도록 욕망의 집을 세우고 허무는 것은 그게 곧 생존인 까닭입니다.

이제 나날이 옅어가는 가을 햇살을 경영할 때입니다. 몸 하나 감잎처럼 물든다면 황폐한 옛집 골방인들 마다하리요. 가없는 노역의 길 위에 선 감나무는 진짬의 소신공양입니다. 우리도 그 속에 몸을 집어넣어야지요. 가을이 폐허의 추억을 구겨 마음 감옥으로 내던지기 전에.

시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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