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시론] 1997년 외환위기 교훈 벌써 잊었나

금융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일생에 한번 볼까 말까 하다는 엄청난 금융위기의 파고가 전 세계를 휩쓸고 있다. 1990년대부터 누적되어 왔던 과잉 유동성이 이제 반대로 디레버리지(De-leverage)를 촉발하여 금융기관의 파산을 유발하고, 결국 리만브러더스의 파산을 계기로 금융시스템과 실물 경제마저 위협하고 있는 상황이다. 더욱이 그 파고는 진원지인 미국을 벗어나 전 세계적으로 파급되어, 한국 역시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주가 폭락, 환율 급등, 은행의 외화유동성 부족은 불과 10년 전 극심한 고통을 경험했던 우리로서는 제 2의 외환위기가 오는 것이 아닌지 우려를 자아내기 충분한 것이었다.

그러나 현재의 상황은 1997년과 다른 점들이 많이 있다. 첫째, 1997년 외환 위기는 명실공히 국가의 부도사태였으나, 현재는 은행의 단기차입 상환의 문제로 국한된다. 1997년 11월말 240억달러로 기록된 외환보유고는 국내 은행에 대출되어 사실상 외환이 바닥난 상태였으나, 2008년 10월말 현재 외환보유고는 2천100억달러이고 최근 유동성 지원을 제외하고는 순수한 대외자산으로 운용되고 있다.

둘째, 은행의 외화자산 운용의 건전성이 유지되고 있기 때문에, 현재 은행의 외화차입 상환의 어려움은 지급불능의 문제가 아닌 장단기 미스매칭에 의한 유동성의 문제이다. 따라서 은행에게 적절하게 유동성을 제공한다면, 은행으로 인한 위기의 가능성은 충분히 통제할 만한 것이다.

물론 은행의 외환 유동성 부족은 가볍게 생각할 문제는 아니다. 외국은행들이 연말을 맞이하여 위험한도를 축소하고 유동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지속적으로 국내은행으로부터 자금을 회수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에 대한 과감하고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유동성 문제가 은행이 중심인 금융시스템의 문제를 야기하고, 국가 전체적인 문제로 확산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필자는 가장 적절한 해결책은 현재 보유하고 있는 외환보유고를 단기적으로 은행에 제공하여 자금 회수에 대응토록 한 이후 회수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정부는 일시적인 외환보유고 축소를 우려하는지 은행에 대한 직접적인 유동성 제공을 매우 꺼리고 있는 상황이다.

오히려 정부 정책은 은행의 유동성 부족을 효과적으로 해결하기보다는 향후 외환위기 가능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우려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러한 우려의 초점은 정부가 1997년 외환위기의 경험을 바탕으로 개선해왔던 금융시스템을 역행하고 있다는 데 있다.

첫째, 정부는 민간 부채를 정부 부채로 전환하여 실질적인 외환보유고가 축소될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정부는 향후 3년간 발생하는 은행채무에 대한 지급보증을 선언하였으나, 이 조치가 효과적이기를 기대할 수 없다. 현재 외국 금융기관의 자금 회수는 국내 신용도 문제 이전에 자신들의 유동성을 확보하기 위한 차원이기 때문에, 정부의 보증이 외국 금융기관의 자금 회수를 막는 데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오히려 동 조치는 장기적으로 민간의 부채를 정부의 부채로 이전하는, 과거 외화예탁금의 경우처럼 실질적인 외환보유고를 감소시킴으로써 국가의 신용위험을 상승시키는 부작용을 낳을 것이다.

둘째, 정부는 은행 건전성 유지의 중요성을 간과하고 있다. 최근 정부는 실물부문에 대한 부작용을 감안하여 은행으로 하여금 가계 및 기업에 대한 자금 지원을 강요하고 있다. 물론 은행의 급격한 대출회수가 야기할 부작용을 감안하여 정부의 정책적 개입이 필요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은행으로 하여금 옥석을 가리지도 못하고 무조건적으로 자금을 지원하도록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최근 정부의 잇따른 은행에 대한 엄포가 결국 은행의 부실화를 의심케 하여 결과적으로 한국의 신용도를 하락시키고 있음을 정부 당국자는 주지해야 할 것이다.

현재의 금융상황은 물론 매우 심각한 상황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을 너무 두려워해서 인지는 몰라도 정부 정책은 매우 혼란스러울 뿐 아니라 임기응변적이어서, 그동안 쌓아왔던 금융시스템의 안정성을 저해하는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다. 정말로 정부 당국자는 1997년 외환위기의 교훈을 벌써 망각한 것인가? 정부 당국자의 기억력을 되살릴 좋은 처방이 있다면 구해주고 싶을 뿐이다.

원승연 영남대 교수(경제금융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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